70년대의 국민학교에는 가정방문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낯선 제도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하시는 날에는 우리 집은 비상사태가 되었다. 엄마는 내게 '어디 가고 안 계신다'라고 선생님께 전하라며 거짓말을 강요하였지만 고지식했던 나에겐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주인집이 있는 다세대 주택에 세 들어 살던 허름한 우리 집을 보여 주는 게 부끄러우신 건 아니었는지.
엄마는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든 커피며 과일을 준비해 선생님을 대접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엄마는 부끄러움이 많은 분이셨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최선을 다하셨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호출로 엄마는 학교를 오실 일이 있었다.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의 엄마가 학교 오는 게 부끄러워 오시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다른 엄마들처럼 화려한 의상과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다니지 않는 엄마가 불만이었다.
엄마가 다녀 가시고 나서 나는 반장이 되었다.
엄마의 성품이나 우리 집 형편을 봐서는 치맛바람으로 반장이 된 것은 절대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해서 거의 4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신 분이다.
어머니의 성실함을 물려받지 못한 나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깜깜한 새벽, 식구들의 아침밥을 준비하고 내가 학교 가기 전에 직장으로 출근하시고 늦은 저녁 피곤한 몸으로 집에 오셔서 저녁을 준비하셨을 엄마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엄마는 버스와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출근하시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는 말씀을 입밖에 내놓는 법이 없었다.
퇴직 후 소일거리가 없어진 엄마에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눈물이 많아지고 매사에 흥미가 없어진 것이다.
나의 권유로 동생이 정신과에 한번 모시고 가서 약을 타서 드셨다. 그리고 그 후로는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해드릴까 곰곰이 생각하다 주말농장을 매입했다. 나를 위한 텃밭이기도 했지만 엄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농장에서 엄마는 온갖 야채와 곡물을 심으며 건강을 찾았다.
엄마는 다시 웃음을 찾고 기운을 내어 매사에 열심이시다.
엄마는 요리를 잘하신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 또한 엄마표 집밥을 제일 맛있게 먹는다. 아내도 엄마가 만들어 주신 반찬이 너무 맛있어서 요리하는 법을 배우고 싶단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주말농장 가는 길에 엄마가 만들어 주는 집밥을 먹고 온다.
엄마는 당신이 만들어 주신 밥과 반찬을 내가 맛있게 먹으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신다.
그게 엄마의 행복이고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