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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담 Aug 30. 2024

아부지, 나의 아버지

어릴 적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냥 아버지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고 손이 떨려 왔다.

귄위적인 아버지의 성격과 고함소리가 싫었다.

내게 아버지는  그저 매일 출근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누런 색 월급봉투를 엄마에게 가져다주는 그런 존재였다.

빛바랜 러닝셔츠를 입고 밥상머리에 앉아 식사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면 슬그머니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터득한 바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잘 보이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그때가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수(秀) 자로 가득한 통신표를 갖다 드리면 껄껄 웃으시며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그 후로 나는 학교 성적이 항상 상위권에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고자 노력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공포나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살갑게 말을 걸어오거나 친절하게 상냥하게 나의 관심사를 물어본 적은 없었다.

빵점짜리 아빠였다.


고등학교를 갈 무렵에서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두려움이 사라진 대신에 거부감과 미움이 자리 잡았다.

아버지의 과거를 알면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만행을 알게 되었다.


외도를 하고 가정을 도외시한 아버지의 비리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증오로 바뀌고 아버지를 무시했다.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셨다.

배운 게 없고 기술도 없어서 몸을 써서 일하는 소위 "노가다" 하셨다. 항상 기름때가 흐르는 작업복을  입고 하루도 쉬는 일 없이 조선소에서 막노동을 하셨다.

머리가 굵어진  나는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꼈다.

미움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과 불행한 삶을 산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아버지는 젊고 혈기 왕성한 중년은 지나 노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가 힘들게 벌어 온 돈으로 대학까지 졸업했다.

어머니도 그냥 노는 법이 없었다.

집에서 부업으로 이쑤시개 마는 일, 시계 줄 조립하는 일 등 쉬지 않고 일하셨다.

그래도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공장에 나가셨다.

집 근처의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 다니셨는데 그 회사를 거의 40년 가까이 다니시고 일흔이 다 돼서 퇴직하셨다.

공장이 몇 번이나 이사를 가서 나중에는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 시간 넘게 출퇴근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 두 분 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정도의 분들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하셨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하셨다.

고된 육체노동의 산물이었다.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하시던 어느 날 손가락을 다쳤다.

지금도 어머니의 검지 손가락 첫째 마디는 반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잘린 손가락을 보고 눈물을 삼켰다.

https://brunch.co.kr/@f371548eede94c0/5

중학교 다니던 어느 날 저녁 나는 집에서 찐빵을 먹고 급체가 걸려 정신을 잃었다.

아버지는 나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렸다.

그래서 나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로 아버지에 대한 나의 미움은 사라졌다.

https://brunch.co.kr/@f371548eede94c0/24

내가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길 무렵 아버지는 한없이 나약한 노인이 되었다.

이제  아버지는 나를 어려워하고 눈치를 본다.

당당하고 거침없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본가에 들르면 아버지는 항상 어렵게 말을 꺼내 내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자신다.


그저께 오후 회사로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넘어져서 크게 다치셨다는 소식이었다.

119  구급대원의 전화를 받아보니 엑스레이 상으로 고관절  골절이라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 했다.

나는 급하게 대구의 정형외과에 아버지를 입원시켰다.

셀 수 없이 많은 검사를 하고 이제 수술을 앞둔 아버지를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하다.

여든여섯의 노인에게 고관절 골절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는 주치의를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내가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밤 나는 홀로 깨어 부디 아버지가 좀 더 많은 시간을 우리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빌어 본다.

그동안 아버지께 좀 더 살갑게 해드리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다.

아버지는 내게 한 분뿐이고 그 아버지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있다.

부디 아버지께 기적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아버지, 한 번도 말하지 못했지만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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