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일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 설 순 없으니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S.E.S. 의 달리기는 가사도 멜로디도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잠시 쉼이 필요하다 느껴질 때면 흥얼거리거나 듣곤 한다. 가끔은 가사에 위로받으며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나는 1353일째 매일 달리기를 하고 있다. 두 다리를 움직여 달리는 달리기가 아니라 육아라는 달리기를.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서 2주를 보내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산후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했다. 조급해하는 초보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산후도우미로 오신 분께서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육아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라고 해요. 오래 달려야 하니 여유를 가져보아요.”
그 말씀은 책에서도 영상에서도 참 많이 접했던 말이었다.
육아는 장거리 달리기 혹은 마라톤이라고.
처음부터 페이스를 너무 올리면 쉽게 지쳐버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이었다. 나는 아이에게만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다 쏟아버렸고, 내 페이스를 놓친 채 지냈다. 아이가 잠든 순간에도 육아 정보를 찾는다는 이유로 아이 생각만 했다. 엄마니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들 그렇게 하면서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했다.
육아가 이어질수록 몸도 마음도 지쳤다.
그러나 멈춰 설 수도 없었고, 끝도 보이지 않았다. 결승선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을 하며 사막에서 달리는 기분이었다. 달릴수록 팔은 푹푹 꺼지는 것 같고, 내리쬐는 태양에 입은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아이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소중했지만, 홀로 달리던 인생길을 아이를 품고서 달리려니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거웠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었고, 홀로 그렇게 달려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는 말이 정답이었다.
출발선에서부터 허덕이던 초보 엄마의 다리는 예전만큼 버겁거나 무겁지 않다. 물론 여전히 쉽진 않다. 여전히 허둥지둥 실수투성이에 몸도 마음도 조급해질 때가 많다. 달리기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잘 달리고 있는지 불안할 때도 많다. 그래도 결승선이 보이지 않는, 아주 길고 긴 마라톤처럼 느껴지던 육아 달리기가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요즘은 육아가 장애물 달리기 혹은 미션 달리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정해진 경로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달리면서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길 위에는 종종 장애물 또는 미션이 있을 뿐이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원더윅스처럼 그런 장애물이나 미션이 너무나 크게 느껴지고 두려웠다. 그러나 아이가 커가는 순간마다 등장하는 장애물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피하는지 둘러보기도 하고, 책이나 영상 등을 통해 장애물을 넘는 요령을 찾아본다. 알고 보면 나에게는 장애물처럼 느껴지는 일은 아이가 자라면서 겪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장애물이나 미션을 만나면 오히려 반갑고 기특한 마음도 든다.
“녀석, 잘 크느라 고생 중이구나, 잘 자라고 있구나.”
육아라는 달리기 속에서 아이는 아이의 페이스대로 그저 묵묵히 달리고 있다.
나는 페이스메이커로 함께 달리거나 관중으로 지켜보며 응원해 주면 된다. 그리고 달리는 아이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나도 함께 달리면서 내 페이스를 찾아가면 된다. 처음 육아를 시작하고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는 아이의 달리기만 보느라 나의 달리기는 멈춰버린 것이었다. 나를 찾고 싶었고, 더는 나의 달리기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좌절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페이스를 존중하며 함께 달리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2023년 1월, 올해부터 육아 달리기 말고 진짜 달리기도 시작했다.
육아도 인생도 체력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체력을 기르고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달려보자고 결심했다. 다른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런데이 어플을 이용해서 달렸다. 30분 달리기 도전을 3차례 성공했고, 10km 마라톤도 완주했다. 달리는 시간과 거리가 쌓일수록 나의 체력과 정신력도 쌓여가는 게 느껴졌다. 달릴 때 느끼는 개운함과 행복함에 점차 빠져들었다. 달리기에 중독된 사람처럼 틈만 나면 달리고 싶고, 달리러 나갔다.
육아라는 달리기도 하면 할수록 엄마력이 쌓이면 좋겠다.
러너스 하이처럼 마미스 하이도 있지 않을까.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30분 이상 달리면 밀려오는 행복감이라고 한다. 헤로인이나 모르핀을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상태나 행복감과 비슷하다고 한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그 느낌, 그게 좋아서 달리기가 좋아졌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마미스 하이(Mommy’s high)도 가능할 것 같다. 육아 일상 중 문득 꿈처럼 느껴질 만큼 행복하다는 마음이 밀려올 때가 있다. 고단했던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그 느낌. 달리기하며 체력과 정신력이 쌓이듯, 육아하며 엄마력이 쌓인 덕분인 걸까.
오늘도 엄마로서의 달리기도
나로서의 달리기도 이어진다.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의 페이스와 비교하지 않고
달리고 있는 이 풍경을 즐기며 그렇게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