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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Aug 20. 2022

잔디 깎기 아르바이트


내가 제주 생활을 만족하는 가장 큰 부분은 속세와 멀리 떨어진 생활이다. 꼭 이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저 멀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주 조용하게 철저하게 분리된 삶. 어쩌다 보니 정말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주위에 아무 집도 없이 우리끼리 산다면 겁이 많은 나는 하루도 이곳에 못 있을 것만 같다. 다행히도 우리 같은 주택 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 살고 있다. 



제주 주택생활의 낭만은 넓디넓은 정원에 있었다. 처음 제주 집에 입주할 때는 정원이 모두 관리된 상태였다. 하지만 제주에 살 집을 찾으러 이 집을 보러 왔을 때는 정원은 마치 우거진 수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 년살이 하던 신혼부부는 정원을 전혀 돌보지 않고 있었다. 작년 8월 말의 정원의 모습을 집주인이 봤더라면 곡 소리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아이고오오 우리 정원" 그랬으려나? 다행히도 우리가 입주한 10월에는 집주인이 미리 관리를 해놔서 그런지 푸릇푸릇 아주 예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주택의 가장 큰 매력은 넓은 잔디밭이었다. 집을 구하며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여기에서 아이가 뛰어논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여기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여름에는 여기에 텐트 치고 캠핑을 해볼까? 멀리 가도 되지 않겠다. 생각만 해도 정말 신났다.





정원에서 즐기는 커피 한잔의 여유







그러나 제주에서도 여전히 진취적이지 못한 우리 부부에게 잔디는 그저 잔디일 뿐이었다. 이사 온 초반에 몇 번 아이와 공놀이를 했던가...? 정원을 만끽하는 기쁨은 잠시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였다.  정원에 앉아 마시는 커피 한잔이면 고기를 굽지 않아도, 캠핑을 하지 않아도 그저 그 존재로 충분했다.




잔디가 무럭무럭 자랐다. 이제 잔디보다 잡초가 더 많아진 탓에 잡초 잔디라고 불러야 할 판이지만, 멀리서 보면 잔디 같기는 했다.




그래도 그때는 늦가을이었으니까 괜찮았다. 곧 잔디는 겨울잠을 잤으니까. 그 후 봄이오며 우린 잔디들과 씨름을 하게 되었다. 봄이오니 잔디가 푸릇푸릇 예쁘게 돋아나는 기쁨은 잠시,  잔디밭의 낭만은커녕 잡초를 뽑는 것만으로 지쳐있다. 특히 잡초를 뽑으며 그 속에 들어있는 벌레를 맞이하는 순간... 내가 꿈꿨던 낭만은 멀어지게 된다. 여기서 텐트를 펴고 잘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게다가 여름이 되며 모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기사는 산 모기들은 새카만 데다 사람을 별로 만나지 않아서 늘 배고파있다. 여기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면 조금 오버를 보태서 우리가 고기를 먹는 것보다 모기 밥으로 먹힌 피의 양이 더 많을 것이다.  




히 잡초를 뽑는 30분~1시간 정도 오롯이 모기떼의 습격을 받는다. 특얇은 레깅스와 긴팔을 입고 잡초를 뽑을 때면 레깅스 사이사이 뚫고 모기가 최소 7~10방은 물어놓는다. 많이 물리기 싫어 레깅스를 벗고 두꺼운 바지를 입었더니 더워서 땀이 정말 많이 나는 데다가 어떻게든 상의 안에 들어와 물어댄다. 독한 놈들...




카페에 가면 꼭 창가에 앉는 내가, 잔디밭이 있던 카페를 제일 좋아했던 내가 잔디밭이 있는 주택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짧게는 열흘 그리고 적어도 보름이면 한 번씩 잔디를 깎아줘야 하는 정원. 실은 잔디와 잡초가 이렇게 빨리, 가득 자라는지 생각도 못해봤다. 이런 곳에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봄엔 나았다. 여름엔 잠을 자고 일어나면 풀이 자라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전 살던 사람들이 괜히 그렇게 수풀이 되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니다. 처음엔 열심히 해보다가 결국 손을 뗀 것이 분명다.




일주일에 2~3번, 땀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다 보면 어쩔 땐 내가 살아 숨 쉬는 일을 하는구나 느낄 때가 있다. 평소에 몸을 쓸 일은 거의 없으니까. 반대로 '이게 진짜 뭐하는 짓이야, 언제까지 이렇게 잡초를 뽑아야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실은 후자의 순간이 더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다.














집에 있는 자동 잔디 깎기 기계는 왜 안 쓰고 있는데?



문제는 기존에 집에 있던 잔디 기계가 쓸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잡초를 더 열심히 뽑기 시작했다. 잔디 사이의 잡초를 뽑다 보면 그래도 조금 정돈된 느낌도 나고 그렇게 길어지지 않으니 이것이라도 해야 했다. 가끔 집에 오시는 엄마가 전기 잔디 깎기 기계로 밀어주기도 하고 한 번은 앞집에서 오셔서 잔디를 깎아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저렇게 버텨갔다. 그러다가 여름이 되며 잡초가 크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니 이렇게 버티는 것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우리 집 자동 잔디 깎기 기계는 처음 쓸 때부터 삐걱거리더니 결국 장마철 고장이 나고 말았다. 난 겨우 한 번을 간신히 써봤는데 고장이 나다니 어쩌자는 것인가! 아무튼 이제 엄마가 오셔도 잔디를 깎아줄 수가 없었다. 아, 어쩌지...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오신 날 앞집에서 잔디 깎기 기계를 빌려다 한번 깎았는데 괜히 빌려 쓰다 그것이 고장 날까 봐 맘 편히 사용하지 못했다. 갑자기 잔디 깎기가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문제는 잔디는 이번만 나고 자랄게 아니라 꾸준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 아직 남은 여름은 길고 가을도 있다. 생각해보니 겨울은 추웠지만 잔디깎이는 하지 않아서 참 편했구나 싶다. 뜻하지 않게 깨닫게 돼버린 겨울 정원 생활의 이점이다.







계속되는 잡초뽑기에 지친 나는 결국 잔디 깎기 기계를 주문했다. 집에 있는 고장 난 잔디 깎기 기계를 고칠 생각은 못해봤고 아무래도 새로운 잔디 깎기 기계를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자동으로 살려니  비싸서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수동 잔디 깎기 기계를 발견했다. 무려 자동 기계의 1/4 비용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수동도 가격차이가 천차만별이었는데, 어차피 수동인데 비싼 것을 살 이유가 있나 싶어서 가장 저렴한 것으로 주문했다!



총알배송, 정확히 이틀 후 제주도에 도착했다. 오예! 생각보다 작은, 그리고 적당히 무거운 상자가 하나 도착했다. 다음 날 그것을 열어서 설치했다. 리뷰에는 설치하는 것이 자세히 설명이 잘 되어있지 않아서 불편했다 라는 후기들이 많았는데, 나도 역시 알 듯 모를 듯 설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끝내 해냈다.



잔디 깎기 기계를 빨리 써보고 싶었던 나는 한낮 땡볕에 기계를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수동 잔디 기계가 자동과 다른 점은 자동은 잔디 깎기 날이 자동으로 돌아가고, 수동은 내가 밀어주면 잔디 깎기 날이 돌아가는 겨우 그 차이였다. 근데 자동도 밀어줘야 하고 수동도 밀어줘야 하니 나에겐 어차피 똑같은 이치다. 왜 자동을 쓰는 거지?





영차,영차! 우리 집 잔디는 내가 깍는다!








한 시간 정도 들여서 정원의 잔디를 모두 깎았다. 한참 잔디를 깎는 모습을 본 남편이 "잔디 깎기 맨 같아" 그러길래 당신도 나가서 어서 잔디나 깎으라고 얘기해줄까 어쩔까? 고민과 동시에 갑자기 잔디도 깍지 않고 내버려 두는 남편이 미워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금세 "멋지지? 나 지금 잔디 깎기 알바 중이야" 



그래도 잡초를 뽑을 때는 땅에 쭈그리고 하느라 힘들었지만 잔디 깎기 기계는 그냥 서서 굴리기만 하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중간에 끼는 나뭇가지, 혹은 돌만 잘 제거해주면 금세 깎을 수 있다. 심지어 재밌을 지경이다. 드디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건가?




실은 제주 주택에 오면 정원을 관리해주는 분을 불러서 관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정원관리사분을 고용하는 것은 가격이 꽤나 비싸다. 막상 직접 해보면 왜 비싼지 이해가 된다. 숨만 쉬어도 돈이 드는 이 시국에 그분들을 고용해서 매번 주기적으로 관리받는 것은 낭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정원을 관리하고자 잡초도 수시로 뽑고, 잔디고 깎고 다.



요즘 나는 잔디 깎기 알바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다. 우리 집에 정원관리사 분을 고용할 돈을 내가 받으면 분명 쏠쏠한 아르바이트가 될 것이다.




또한 잔디를 깎다 '생각보다 별로 안 힘든데? 내가 잔디 깎기 아르바이트하면 금세 떼돈 벌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마음도 문득 들었다. 그러나 금세 마음을 접었다. 내 거나 잘하자! 그래 이제 웬만하면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지경이다. 제주도에서는 자급자족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간다. 앞으로도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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