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이 있어 물건이 따뜻하다
한낮 서울이 영하 10도, 우리 동네는 영하 4도, 체감온도는 더 낮지. 한파주의보에 대설주의보, 강풍주의보, 건조주의보까지 오늘 한반도는 최악이다. 정치한파까지 더하네! 이 추위에 어머니가 실크스카프를 목에 두른다. 경로당에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 부드러워서 좋다는 어머니의 실크스카프 위에 도톰한 모직 목도리를 감는다.
어머니의 캐시미어 목도리는 40년 넘은 물건이다. 명품도 모르고 캐시미어가 고가품인 줄도 모르던 나이에 학모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귀한 물건이라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어머니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으시다. 목도리는 아끼면서 누가 보냈는지, 이름도 얼굴도 잊고 산다. 오늘 보니 처음처럼 폭신하지도 않고 매끄럽지도 않다. 어머니에게 더 좋은 겨울 목도리를 사드리지 못했네.
아들이 헤어드라이어를 보냈다. "바람이 약합디다. 이제 신상품으로 바꾸시지요." 아들이 결혼하며 두고 간 물건을 12년째 사용한다. 청년 아들의 손때 묻은 물건이라 따뜻한데 불혹의 아들이 더 좋은 드라이어를 보냈다. 바람도 많고 기능도 다양하고 가벼워서 좋다. 받자마자 인증샷을 보내고 머리카락을 말려보고 '고맙다'로 답한다.
혼수품으로 산 그릇들, 유행지나 입지 않는 옷가지들, 버릴 때도 살아남은 책들. 사연이 있다고 물건에 연연할 일인가? 사연도 퇴색하고 기억도 아련한데 그 물건들을 쌓아둘 일인가? 새것을 만나는 설렘도 점점 작아지니 새로 살 일도 적어진다. 그래도 아들이 새 드라이어를 사주니 기쁘다. 언제 어떤 말을 하며 보냈는지 떠올리며 아들을 느낀다. 구순의 어머니가 한사코 말리더라도 새 목도리를 사드려야겠다. 떠듬떠듬 사연을 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