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다
산책을 하다가 주차된 차 뒤켠에 철퍼덕 엎드린 길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도 못 봤어야 했는데, 얼떨결에 휴식을 방해받은 고양이는 슬쩍 귀를 세웠다 내렸다 하면서 무언의 경고를 했다.
그냥 지나쳐달라고. (고양이 언어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그랬다. 어딘가 지쳐 보였다.)
담벼락을 슬쩍 감고 있는 주황색과 초록색의 덩굴식물들을 쳐다보다가, 봄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흔적들을 발견했다. 그 흔적들은 상처처럼, 서서히 아물며 여름을 맞으려고 준비한다. 시간은 참 무상하다. 맺히는 것이 없다.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애써보지만 항상 실패하지.
세상의 고통들은 어쩐지 다채롭게 고통스럽다.
고통이 올 때, 피할 수 없고 버텨야만 한다면, 한 가지 대처방법이 있다. 살짝 우회하는 방법인데,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물리적인 형체도 없는 시간의 노예를 자처하게 되었으므로, 그러잖아도 고통인 삶자체에 시간이 주는 고통을 더 얹게 되었다.
어느 집 담장에 핀 꽃이 너무 붉어서, 주변의 색들을 다 바래보이게 만드는 듯하다. 어쩐지 화사해서 예쁜 게 아니라, 진해서 슬프다.
너도 이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을, 공간을, 상황을 버티고 있니, 난 버티는 중인데.
그저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것인지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뒤돌아서 본다. 덧없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건, 어찌나 슬픈 일인건지.
꽃이 선명하게 진홍색으로 붉다는 건, 슬픈 거구나.
짙푸르고 짙붉은 고통들 사이에서 길을, 잃다.
계단 쪽을 등지고 서서
상복을 입고 선 채, 때가 덜 묻은 아직은 말갛고 어린 얼굴을 한듯한 그는 그 옷의 의미를 잘 알고 있겠지만, 진짜로 알게 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
알게 될 때, 진정 슬플 텐데.
어떤 색의 슬픔이 보이는지 나중에 물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얕은 잠에서 살짝 덜 깨어 졸린 듯한 목소리로,
크고 둥그스름한 눈을 아주 미세하게 살짝 찌푸리며 잠이 잘 오지 않아 힘들다는 그에게, 차가운 얼굴을 하진 말아야겠어.
인생은 덧없지만 시간은 공평하고 또, 잔혹하게 흐른다. 켜켜이 쌓인 질문들은 아직 뒤에 얌전히 놓아두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