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기, 상상하기
눈부시게 밝고 환한 햇살이 내리쬐는 초등학교 운동장 여기저기서 즐겁게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질 때, 아무도 오지 않는 학교 안 도서관은 조용하고 어두컴컴한데, 온 벽면 한쪽을 전부 차지한 커다란 여러 개의 창문으로 투과되는 햇빛 덕분에 그곳은 그나마 도서관스러운 빛과 차분함을 갖추고 있었다.
미닫이문을 스르르 열고 들어가 앉아 앤을 만난다.
책으로 만나는 앤은 생동감이 넘친다. 내 머릿속에서 그녀는 정말로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럽다’.
삐쩍 마른 주근깨투성이 빨간 머리를 가진 아이는 칙칙하고 메마른 현실에 절망해서 웅크리고 머리를 감싸는 대신 거기에 자신이 가진 언어와 상상력의 힘으로 색색의 고운 비단을 두르고 반짝반짝 빛나는 비즈를 두를 줄 안다.
삶이 고단하고 고통러운 건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는데, 열 살 남짓한 짧은 인생살이에 별의별 종류의 고된 경험을 압축적으로 겪어 내공이 장난이 아닌 그 작은 고아소녀가 그걸 해낸다.
어린아이에게 실제 현실상황은 의외로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정말 많은 경우,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을 정말 비참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인 경우가 많다.
앤의 경우,
“.. But it’s a million times nicer to be Anne of Green Gables than of nowhere in particular, isn’t it?”
(.. 하지만 백만 배 더 나은 거야, 초록색 지붕 집의 앤이/ 어디에도 딱히 속하지 않은 것보다는, 안 그래?) 하는 식이다.
그저 편안히 발 붙이고 서 있을 공간 한 군데 없던 어린아이가 드디어 자기만의 소박한 안식처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욕심껏 움켜쥐고 불안에 떠는 본능적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자신의 현재를 한껏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음이 즐겁고 행복한 상황에서 약간 초라하고 덜 갖춰진 것들은 사소해서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지나고 나면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기 마련이므로.
그러면서,
“Marilla, isn’t it nice to think that Tomorrow is a new day with no mistakes in it yet?”
(마릴라, 멋지지 않나요/아무 실수 없는 새로운 내일이 아직 있다는 것이?)
라고도 하는 이 아이는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겪는 다양한 실수들을 트라우마가 아니라 영양 가득한 자양분으로 만들며 단단하고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한 인간으로 쑥쑥 자란다.
드디어 “I don’t want to be anyone but myself!” ‘나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되고 싶지 않은‘ 당당한 앤 셜리로 우뚝 설 때까지.
이런 태도를 보면서
이제야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볼 줄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갖고 있었지만 놓쳤거나 혹은 스스로 놓아버렸던 것, 나 스스로 창피하게 여겨져서 포기했던 과감성과 솔직함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앤이 아니었던 나는
너무 빨리 실망하고 너무 빨리 체념했으며, 너무 빨리 마음을 닫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구덩이 같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긍정하기 위해
약간의 거리를 둔다. 살짝 내려놓는다. 약간의 틈새가, 그 간격이 숨구멍을 만들고 여유를 준다.
나는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니까. 그 공간 안으로,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이 슬그머니 방문했다. 초록빛을 살짝 머금은 회색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장소와 상황 등 약간의 각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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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과 함께하는 영어/북하우스/저자-조이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