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by 정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앞서가는 아빠와 딸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오늘은 안 다쳤나? 밥은 많이 먹었나?"

아빠의 물음에 대여섯 살로 보이는 딸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일부러 느린 걸음으로 딴청 피우는 척했지만 두 사람이 멀어져 갈 때까지 내 시선은 꽤 오래 머물렀다. 유치원에서 딸이 어떻게 지내다 왔을지 궁금한 아빠의 다정한 마음이 다소 무뚝뚝하고 급한 물음으로 내뱉어졌지만 그래서 더 다정한 마음이 돋보였다.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말 안에 감춰진 부드럽고 다정한 마음이 잘 보이는데 어린아이 일 때는 그 마음을 알리가 없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같은 동네에 사는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주택인 우리 집 담 너머 빌라에 사는 친구였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와 친구의 환경이 아주 달랐던 것처럼 나는 참 작았고 친구는 키가 컸다. 어느 날은 학교에 갔는데 친구가 몹시 피곤한 얼굴로 주변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어제도 잠을 못 잤다. 그 이상한 아저씨 때문에 진짜 미치겠다. 계속 욕하고 혼자 떠드는데 이어폰을 껴도 다 들린다니까. 경찰에 신고해도 어쩔 수 없나 봐."

화가 잔뜩 나서 말하는 친구의 목이 빨개진 것만 보느라 내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지금에서야 느낀다. 그 이상한 아저씨. 동네에서 유명한 아저씨. 술만 먹으면 욕하고 이웃들과 싸우는 아저씨. 경찰차가 자주 들르는 집에 사는 어쩔 수 없는 아저씨. 우리 아빠. 부끄러웠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것, 국민임대주택에 사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내가 부끄러웠던 건 친구의 입에서 이상한 아저씨로 불러지고 있는 내 아빠였다. 우리 아빠가 그 이상한 아저씨인 것이 부끄러웠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내 아빠가 부끄럽지 않았더라면 그 시절에도 난 행복했을 거다. 차라리 나에게만 이상한 아빠였더라면 어땠을까. 다른 누군가에게도 이상한 아저씨여서 그것이 내내 부끄러웠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번잡한 사거리 한복판에서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빠랑 둘이서 시장에 갔다가 신호등을 건널 때였다. 아빠는 술에 취해있었고 그런 아빠가 조마조마한 때였다. 역시나 술 먹은 아빠와 함께일 때는 사건사고를 피해 갈 수가 없다. 마주 걸어오던 아저씨와 아빠의 어깨가 살짝 부딪혔고 아저씨는 사과를 했던 거 같다. 당시 아저씨는 술에 취하지 않은 어른이었고 사과를 할 줄도 아는 어른이었다. 아빠는 갑자기 흥분을 하며 윗옷을 벗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의 상체 앞뒤로 새겨져 있던 문신과 아빠 얼굴 한번, 문신 한번 번갈아 쳐다보는 사람들, 아빠의 입 속에서 불처럼 뿜어져 나오는 욕설과 귀를 막고 지나가는 사람들, 아저씨를 향해 달려드는 아빠와 나를 보며 돌아서던 아저씨의 한마디를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니 딸을 봐서 참는다."

나는 그때 그 아저씨가 정말 고마웠다. 아빠랑 싸우지 않고 참아줘서, 그 자리를 그냥 떠나 줘서, 겁에 잔뜩 질린 나를 불쌍히 바라봐줘서. 기어코 아빠랑 같이 싸우는 사람들도 많이 봐온 나였기에 아빠를 무시하고 돌아서는 그 아저씨가 정말 고마웠다.






아빠와 딸이 함께인 모습을 볼 때면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내 아빠도 나에게 저런 물음을 해줬다면 난 그걸로 행복했을 텐데. 오늘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안 다치고 잘 지냈냐고, 밥은 많이 먹었냐고. 그러면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그랬노라고 대답해줬을 텐데.. 부끄러운 아빠여서 내내 마음에 묻고 살지만 어느 아빠와 딸을 볼 때마다 불쑥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나는 내 안의 이 부끄러움을 따뜻한 곳에 잘 묻어주고 새로 태어나기를 오늘도 꿈꾼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로,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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