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타고 가다 창문 밖으로 무덤을 보았다. 가족묘지인지 여러 개의 무덤이 한데 모여있었다. 예쁘게 잘 퍼담은 아이스크림 같았다. '참 깔끔하게도 다듬어놓았구나'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저 무덤의 주인은 살아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상상해보게 되었다. '가족들과 친구들, 주변 이웃들에게 좋은 사람이었을 거야. 그들의 삶을 잘 보살펴주고 예쁘게 다듬어주는 사람이었을 거야. 그러니 죽어서도 저렇게 예쁜 무덤이 되었겠지.'
"다듬다"
몇 가지 뜻을 담고 있는 단어인데 그중에서 눈에 띄는 설명이 있었다.
"필요 없는 부분을 떼고 깎아 쓸모 있게 만들다."
쓸모 있게 만든다. 쓸모라... 우리 인생살이 쭉 둘러보면 완벽한 인생은 없더라. 필요 없는 부분 같은 거 하나씩은 가지고 있더라. 필요 없는 부분은 떼고 깎으면 되기에 쓸모 있게, 쓸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 없는 부분'이라는 말이 완전히 맞는 말인가 싶다. 물건이야 그럴 수 있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필요 없다 여겨졌던 부분까지 언젠가 쓸모 있게 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떼고 깎는 과정'. 상처와 아픔, 과거와 실수 같은 것들을 떼고 깎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간들을 지나면서 조금씩 천천히,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그리고 이 나라와 세상에서.
그런데 정말로 문자 그대로 '떼고 깎는' 행위를 두 눈으로 본 적이 있다. 자기 몸을 스스로 다치게 하는 행위, 자해. 쓸모 있게 만들기 위해 다듬는 것이 아닌,스스로를 필요 없고 쓸모없다 생각하며 아프게 하는... 괴로움과 힘듦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에 대한 미움과 타인에 대한 미안함을 바르게 다스릴 줄 몰라서 자해를 하던 사람이 있었다.
아빠의 몸 곳곳에는 자해 흔적이 가득했다. 나는 실제로 그 현장을 목격한 적도 있었지만 주로 엄마가 먼저 아빠의 상처를 처치하고 난 이후의 흔적들을 마주하곤 했다. 방에는 시뻘건 핏자국, 젖은 휴지와 수건, 소독약과 대일밴드같은 것들이 정신없이 나뒹굴었다. 어릴 땐 무섭고 두려웠다. 아빠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가 술에 취하면 언제 갑자기 자해를 할지 몰라 조마조마한 삶을 살았다. 어떤 때는 날카롭거나 다칠 위험이 있는 물건들을 아빠 몰래 숨겨두기도 했다.
어느 날 피를 보며 중얼거렸던 아빠의 말을 기억한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아니, 피를 보고 살 것 같다고? 아빠의 상태는 진짜 심각했다. 아빠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받을 수 없는 자기 자신. 술을 먹어야지만 무언가를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자신.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자신. 가난한 현실과 상처받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다듬지 못하고 자해를 진정제로 삼았다. 마음에 난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빨간 피와 상처를 보면서 이상한 안도감에 빠지고, 자신을 다치게 함으로써 이미 저질러버린 잘못을 해결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 아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줄 수 없는 아빠를,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아가게 하는 아빠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자랐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부끄럽고 못난 상처를 연구? 하는 데까지 자라 버렸다.
무덤을 보며 예쁘게 잘 퍼담은 아이스크림이 먼저 생각난 것은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쁘게 다듬어놓은 무덤에서 죽음이 아닌 삶이 보였기 때문이다. 잘 살다 죽은 사람의 무덤은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닿고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누구를 다듬고 있나? 나는 지금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며 내 치부와 아픔을 다듬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숨소리에 가만히 귀를 대고 내 호흡을 다듬는다. 사랑하지 못한 이의 처절한 피 흘림도 다듬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를 살린 보혈을 의지해서 다시 필요 없는 부분을 떼고 깎는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