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원

by 정귤


유치원 하원 길에서 하리가 묻는다.

"엄마, 오늘은 돈 가지고 왔어?"

하리는 요즘 뽑기에 재미를 붙여서 아이스크림 가게 앞 뽑기 기계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하리를 데리러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나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챙긴다. 손바닥 안에서 오백 원을 굴리며 걷는데 잠시 잊고 살았던 그 순간이, 그때의 쭈뼛쭈뼛하던 감정이 얼음 마냥 동동 떠올라 손등이 차가워졌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본 후, 건물 1층에 있는 약국으로 간다. 처방전을 내고 차례를 기다린다. 내 이름이 불리고 약사가 약 설명을 해준다. 그때부터 두근두근 대기 시작한다. 제발 작은 소리로 약값을 말해주길, 제발 내 뒤에 아무도 없길 바라면서...

"오백 원입니다."

아! 알고 있는 금액인데, 매번 똑같은 약값인데 어쩜 이렇게 약국에 올 때마다 깜짝 놀라는지 모르겠다. 오백 원도 지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동전을 올려놓는다. 약봉투를 받아 들고 출입문을 향해 걷는 동안 나는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오백 원입니다."를 들은 사람이 있는지 살피느라 내 눈과 귀가 몇 배는 커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고부터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우리 집 병원비는 천 원, 약값은 오백 원이었다. 없는 형편에 병원비는 정말 큰 부담인데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특히나 아빠의 암 수술로 인해 무시무시한 병원비를 경험하고서 더더욱 의료 혜택은 감사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린 나는 병원비 천 원, 약값 오백 원이 참말로 창피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친구들은 다 몇천 원씩의 돈을 내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달랑 천 원, 달랑 오백 원을 내는 내가 그냥 천 원짜리, 오백 원짜리가 된 것만 같았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다 날 향해 '쟤는 왜 저것밖에 안 내는 거지?' 하며 물어올 것 같은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설령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도 그게 뭐 어때서.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 형편이었음을 인정하고 충분히 누리고 감사하며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교복 입은 내가 천원치 진료를 받고 오백 원 치 약을 받아도 건강하게 회복해서 눈치 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나처럼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더 굳은 결심을 품고 살아냈더라면 어땠을까. 네 가족 병원비가 너무 비싸다며 투덜거리는, 비상약으로 버티는 아줌마가 다 되어서야 오백 원 인생을 미워만 했던 어린 내가 가엽다.






가난했던 나는 가난한 사람이 보인다. 서러웠던 나는 서러운 사람이 보인다. 외로웠던 나는 외로운 사람이 보인다. 멀쩡한 사람에게서도, 웃고 있는 사람에게서도 오백 원의 짤랑임이 들릴 때 약값 오백 원을 내고 쭈뼛쭈뼛하던 나를 본다.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 보이고 싶지 않은 아픔이 들린다. 오백 원을 뽑기 기계에만 넣어본 내 딸은 아직 모른다. 오백 원을 약값으로 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평범한 사람이 누리는 평범한 삶을 꿈꾸지만 오백 원 인생 앞에서 수많은 날들 참 많이도 가난하고 서럽고 외로웠다는 걸.


오백 원 인생을 감히 비웃을 수 없다. 오백 원 동전 앞면의 학을 아는가? 추운 겨울을 나는 겨울 철새다! 천연기념물이다! 수명이 길어 십장생의 하나이기도 하다! 학을 품은 오백 원은 이리도 멋지다. 나는 무엇을 품은 인생인가? 나를 가난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건 오직 내 생각과 마음뿐이다. 내 인생 오백 원이어도 좋다. 추운 겨울도 기어코 이겨내고,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나를 소중히 여기며, 오래오래 살아내는 학처럼 끝까지 살란다. 쭈뼛쭈뼛한 인생들 메고 훨훨 날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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