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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고 슬픈 ‘화양연화’

―이쾌대의 <카드놀이 하는 부부>

by 사이

붉은 꽃이 만개한 봄날의 정원, 앳된 얼굴의 부부가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야외 테이블을 덮은 미색(米色)의 보 위에는 적색 술이 담긴 양주병과 흐트러진 카드가 있다. 칠흑 같은 머리칼과 눈동자, 오뚝한 콧마루 아래 앙다문 붉은 입술,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두 볼의 젊은 신부는 차라리 한 송이 꽃이다. 초록의 한복 저고리 위에 짙은 붉은 색의 깃과 고름 그리고 끝동은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심지어 손에 쥔 카드 뒷면에도 꽃이 그려져 있다. 맞은편에 반쯤 가려진 신랑은 시원스러운 이목구비에 짧은 머리, 햇볕에 알맞게 그을린 살갗 때문에 단단하고 건강해 보인다. 마치 한 송이 꽃을 돋아나게 하는 나무줄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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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신혼의 행복을 강렬한 색채로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처음부터 저를 압도하는 것은 부부의 시선이었다.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이 무심한 듯하면서도 다소 경직된 표정 때문인지 의미심장하다. 추악함과 번뇌를 모르는 무구(無垢)한 눈빛, 그 무구함이 오히려 그림을 보는 나에게 불안감을 안겨준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들의, ‘화양연화’

이쾌대는 휘문고보 졸업반이던 1932년 한 살 연하의 유갑봉과 결혼한다. 그때 이쾌대는 열아홉 살, 유갑봉은 열여덟 살이었다. 대지주의 아들이 고교 재학 중 첫눈에 반한 여고생에게 수없이 연서를 보내며 구애한 끝에 결실을 얻었으니, 당시 미술계의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선 이쾌대는 유학시절을 아내와 함께 보내며,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을 수없이 그린다. 아내는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와 같은 존재였다. 이 그림을 그린 정확한 제작 연도를 알 수 없지만, 그즈음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들, 행복에 취해 얼근한 날들, 그 어느 날에 이쾌대는 꽃 같은 아내와 함께하는 행복한 신혼의 순간을 화폭에 담아 불멸을 기획했다. 그림 속의 그 순간은 그들의 화양연화(花様年華)였다.


그들의, ‘운명’

1938년, 제국미술학교 졸업반이던 이쾌대는 일본의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서 <운명(運命)>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한다. <운명>에서 그는 죽음을 앞둔 병든 남자와 그로 인해 슬픔에 잠긴 여자들의 모습을 그렸다. <카드놀이 하는 부부>와 불과 몇 년 사이를 두고 그려진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어둡고 절망적인 느낌의 그림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식민지 조국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그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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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3년 후에 출생한 이쾌대는 어린 시절 매우 유복하게 자랐다. 창원군수를 지낸 대지주의 둘째 아들로, 5천 평에 이르는 그의 집에는 교회, 학교,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고 전한다.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던 그 시절 야구를 즐기고, 유학지 일본에 집을 지어 신혼을 보내는 등, 보기 드문 유한계급의 삶을 산 듯하다. 그런데 열두 살 차이가 나는 형 이여성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중국 상하이와 난징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다 3·1운동 때 국내로 들어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이런 형을 보며 자란 이쾌대도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운명>은 이쾌대가 ‘개인적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역사적 현실’까지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운명>에 이르러 무구했던 부부의 눈에 죽음과 이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20여 년이 흐른 후, 이쾌대와 유갑봉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기약 없는 생이별을 하게 된다. 이쾌대는 6·25전쟁 중 부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3년 남북포로교환 때 어쩔 수 없이 월북을 선택한다. 그날 이후 부부는 다시는 살아서 만나지 못하게 된다. 1980년대 말 월북 작가 해금 조치가 있기 전까지 유갑봉은 그의 존재와 작품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며 살아야 했다.


그들의, ‘오래된 미래’

그림 속 어린 부부는 자신들에게 닥칠 가혹한 운명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구한 눈이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것은 직감적으로 예감한 어두운 미래를 언뜻 보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역사의 격변기에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인간의 존엄과 사랑의 언약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쾌대는 형을 보며 막연히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화양연화가 찬란하면서도 슬픈 것은 이 운명의 예감 때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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