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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Oct 09. 2024

너는 왔네, 나에게로

―메리 커샛의 <아이의 목욕>

 “아이 하나를 감당 못하냐?”

 무심결에 던진 가벼운 핀잔에도 마음에 생채기가 아물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남학교 건물에 하나밖에 없는 여자 화장실 변기에 앉아 휴대용 유축기로 젖을 짜서 18개월 동안 억척스럽게 모유를 먹였다. 학교 타종에 맞춰 잰걸음으로 생활하느라 출산하며 생긴 치질이 변기를 피로 물들이는 것을 보고도 치료할 시간조차 없었다. 밤만 되면 숨이 넘어가게 잦아지는 기침으로 잠을 설쳤다. 그즈음 퇴직을 결정했다. 그리고 육아와 일을 병행했던 그날의 기억들은 상자 안에 아무렇게나 넣어 기억의 다락방에 서둘러 감췄다.     


목욕물에 일렁이는 평화

 메리 커샛는 남성 중심이었던 19세기 유럽 화단에서 활동했던 드문 여성 화가였다. 미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족의 반대와 화단의 배척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당찬 여성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아이를 낳은 적은 없지만, 그녀는 주로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아이의 목욕>(1893)은 그녀가 쉰 살이 다 되어가는 내 나이 즈음에 그린 그림이다.     


 <아이의 목욕>에는 줄무늬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올린 여성이 서너 살쯤 보이는 여자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 발을 씻기고 있다. 그림 속 단서나 그림 밖 설명이 없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엄마와 딸의 관계임을 ‘느낄’ 수 있다. 아이의 허리를 감싸 품에 안은 커다란 손, 작은 발을 씻기는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 그리고 그 넓은 품에 몸을 맡긴 아이의 느긋한 표정이 엄마와 딸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을 보여준다.

 

 서로의 체온이 전해진 것일까? 모녀의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다. 투명하고 뽀얀 살결과 토실토실 살이 찐 아이의 맨몸은 아이가 받고 있는 사랑의 질감을 짐작하게 한다. 둘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데,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을 눈으로 쓰다듬으며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목욕물 위로 일렁이는 둘의 모습이 있다.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징글징글한 육아 상자

 그녀의 그림은 내게 기억의 다락방에 감춰 두었던 먼지 낀 상자를 꺼내 보게 했다. <아이의 목욕>과 같은 평화로운 장면을 찾기 위해 상자 안을 한참을 뒤졌다. 그림 속 여성이 입은 긴 소매의 드레스와 카펫이 깔린 거실, 꽃무늬가 그려진 우아한 물항아리는 나와 아이의 목욕 장면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나의 육아는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바닥을 긁으며 내는 앓는 소리로 요란했다.


 아침은 항상 울음소리로 시작했다. 막 돌 지난 아이를 시누이에게 맡기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차 시동을 걸 때까지 베란다 창밖으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귓가에 맴도는 울음소리에 마음이 짓눌려 서둘러 퇴근하면 의무처럼 하는 일은 목욕시키기였다.


 태어날 때부터 태열이 심했던 딸아이는 머리를 긁어 생긴 진물로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졌다. 집에서 조촐하게 찍은 백일 사진에는 머리를 빡빡 밀고 얼굴 곳곳이 불긋불긋한 아기가 아빠 품에 깨질 듯이 안겨 있다. 우리는 당시 최신 의학적 치료와 민간요법을 찾아다니며 아토피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전철을 답습하고 있었다.


 대야에 온도를 맞춰 물을 채우고 장난감과 함께 아이를 물에 담갔다. 목욕하는 아이 옆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러줄 여유는 없었다. 분리불안을 느끼지 않게 욕실 문을 열어두고 집안을 정리하거나 설거지를 했다. 목욕이 끝나면 아이를 눕혀 놓고 병원에서 처방해준 치료제와 보습제를 온몸에 발라주었다. 이 일과를 조금만 게을리 하면 아이는 밤새 긁느라 잠을 설쳤고, 진물과 피로 속옷을 더럽혔다. 아이의 목욕은 치료의 일부였다.


 아직도 생생히 되살아나는 몹쓸 기억의 생명력! 나는 징글징글해서 몸서리쳤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경험해 보지 못한 화가가 현실 육아를 모르고 그린 그림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너는 그렇게 왔다

 그러나 며칠 후 거칠고 무거운 기억들이 내 깊은 곳으로 서서히 다시 가라앉고 있었다. 귓가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하재봉의 시를 강산에가 노래한 <널 보고 있으면>이 잔잔히 맴돌았다.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태어난 아이에 감탄하며 반복해서 듣고 흥얼거렸던 노래였다. “너는 왔네 나에게로/붉은 입술에 장미꽃 물고/돌아선 날 향해/네 눈 속의 별 떨어뜨리며”.


 다시, 그녀의 그림을 찬찬히 보았다. 그제야 내 모습과 아이의 모습이 그림 속에서 보였다. 그림 속 엄마는 보배로운 것을 다루듯 아이의 몸을 조심스럽게 씻기고 있었다. 육아가 힘들었지만, 나는 우리 딸과의 만남을 ‘보배로운 약속’이라고 여긴다. 성격적 결함과 미숙한 판단으로 자잘한 실수와 실패를 이어오며 별 성취 없이 나이를 먹는 동안 이 세상 태어나 해낸 일 중 유일하게 훌륭한 일이 딸과의 만남이라 확신한다.


 그림 속 아이의 피부처럼 ‘투명한’ 우리 딸을 보며 ‘나를 비워’ 갈 수 있었고, ‘목마른 사랑’, ‘목마른 영혼’은 아이의 ‘눈 속의 별’을 보며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아이는 그렇게 왔다. 나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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