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독>
장욱진의 <독>을 처음 보았을 때, 느닷없이 ‘0’이 떠올랐다. 화면을 가득 채운 중배가 볼록한 독, 둥글넓적한 운두, 살포시 독 뒤에 떠오른 보름달, 호기심 가득한 까마귀의 눈동자까지 모두 ‘0’으로 보인다. 보름달을 배경으로 독의 중배에 걸려 있는 가냘픈 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세상은 둥글고, 또 둥근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유독 그의 그림에서 ‘0’이 연상된 것은 형태 때문만은 아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내 그릇으로는 이해가 요원한 말이 입속에 맴도는 걸 보니 그림이 내게 던지는 화두가 ‘존재’와 ‘무(無)’인 것 같다.
독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고추장, 된장을 담는 그릇이다. 그림 속의 독은 흙에서 태어나고, 나무는 동산 같은 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있다. 새끼 까치는 둥지에서 노는 듯 독 앞에서 편안하다.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부러질 듯 가는 다리가 생명의 연약함으로 보여 안쓰럽지만 어미 품 같은 독이 감싸주고 있어 든든하다. 집을 ‘짓는다’라고 하듯 흔히 독을 ‘짓는다’라고 말하는데, 정말 ‘독’으로 새끼 새의 ‘집’을 지어 주었다. 그 집에서 만물이 태어났다.
가득 찬 것은 반드시 기운다. 보름달은 그믐달이 될 것이다. 먹거리를 넉넉히 채워 생명을 살렸을 독도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림 속의 독은 이미 늙었다. 땡볕에서 평생 밭일한 늙은 농부처럼 시커멓고 거칠다. 자글자글한 주름 같고 툭 튀어나온 혈관 같은 실금. 우리네 시골 할머니의 얼굴이다.
생성과 소멸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유한한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슬픔이 깃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애틋함은 있어도 연민은 없다. 왜일까? 화면을 가득 채운 독, 독이 배경을 다 밀어내고 거대하게 혼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다른 존재들을 주눅 들게 하는 게 아니라 어우러져 있다. 독과 배경을 나누는 색과 선은 있는데, 경계는 없는 듯하다. 독이 땅의 연장인 것 같고, 땅이 잠시 독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언뜻 보면 하늘만 있는데, 그 노란 하늘에 더 노란빛이 모여 잠시 달을 이루고 있다. 달도 곧 하늘이 되어 사라질 것 같다. 가득 찬 것 같은데 비어 있고, 비어 있는 것 같은데 가득 차 있다.
‘0’이라는 숫자는 인도에서 처음 만들었다. 태양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시작과 끝이 같은 모양의 ‘0’에는 공허를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본 인도인들의 철학이 담겨 있다. 불교 경전인 《반야심경》에 있는 문장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색을 ‘존재’로 ‘공’을 ‘무’로 해석했을 때, ‘존재’와 ‘무’는 같다는 뜻이 될 것이다.
장욱진은 성홍열 치료차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서 거처한 것을 계기로 불교적 세계관을 담은 그림을 평생에 걸쳐 그렸다고 한다. ‘독’의 주제의식이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에 둔 것인지는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의 종교관을 모르고 그림을 봤던 내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느낀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