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한때는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턱은 쳐들고 발은 가벼워 땅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허황된 꿈을 좇아 지칠 줄 모르고 허공에서 쏘다녔다.
언제고 열렬하고 헌신적인 사랑이 찾아오리라 믿었다.
광화문역 예술 영화관의 면접관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영화였다”로 시작하는 ‘자소서’를 칭찬했다. 상업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더니 연락하지 않았다.
강남역 영화 잡지사의 면접관은
마감일을 앞둔 밤샘 작업에 내 저질 체력을 못 미더워했다.
국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수십 통의 입사지원서는 회신이 없었다.
청춘의 사랑은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페닐에틸아민의 장난.
멜랑콜리로 장사하는 풋내기에게 속고 속인 셈 쳤다.
그 무렵, 연극을 접은 뒤 걸핏하면 배낭을 싸는 나의 친구와 변산에 갔다.
제주에서 물질하다 잠수병으로 다리를 저는 민박집 주인아저씨는
직소폭포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재백이재를 지나 폭포 뒤편으로 가는 길.
새벽까지 비가 온 터라 계곡에는 옅은 물안개가 피어 있었다.
늘어진 버드나무와 키 작은 잡목, 이름 모를 들꽃 사이로 잔잔하게 물이 흘러갔다.
문득,
희고 창백한 그림자가 비쳤다.
물 위로 ‘오필리아’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걷는 내내, 세상에 배반당한 그녀가 우리와 동행했다.
멀리서, 정신을 흔들어 깨우는 낙하 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만났다.
허공을 걷던 발을 땅에 끌어내리고
꾹꾹 바닥을 누르며 걸었다.
안녕, 오필리아!
안녕, 청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