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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Oct 13. 2024

10. 마음의 경첩

우타나 아사나

  길어진 보고 탓에 퇴근도 늦어졌는데, 요가원 주차장까지 만차였다. 주변을 두 바퀴 돌고서야 수업 5분도 채 안 남기고 겨우 요가원 건물에 도착했다. 막 닫히는 엘리베이터에 손부터 뻗어 공기반 소리반 "감사합니다." 하고 탔더니 수련실에서 자주 뵙던 중년 여성분이 문 열림 버튼을 눌러 주고 계셨다. 오랜 수련의 태가 나는 바른 자세와 마른 근육질 몸, 느슨히 묶은 웨이브진 어깨길이 머리에 세련된 패션 감각으로 평소에도 나이가 가늠되지 않아 유심히 보게 되던 분이었다. 1평 남짓한 엘리베이터에선 그녀에 대한 관심을 숨기고 대각선 구석에 자리 잡아 벽거울로 눈을 돌렸다.


  회사는 확실히 다른 행성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출근만 하면 이렇게 얼굴 근육과 기운이 저 땅끝까지 주저앉을 리가! 목성이 지구 중력의 2.5배라던데 사무실 체감 중력은 목성 핵만 대여섯 개는 모아 놓은 것 같다. 싱크홀처럼 움푹 들어간 눈썹 앞머리 긴장, 지방 소극장 커튼 장식처럼 늘어진 눈밑 그늘과 팔자 주름. 복화술로 샌 한숨 따라 처진 입꼬리. 점심 먹고 고친 화장인데도 이마는 들뜨고 콧등은 뭉치고 두 뺨은 날아간 파운데이션 잔해까지... 아침 샤워하곤 볼 만했던 얼굴이 아홉 시간 만에 눈 뜨고 못 봐주게 됐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TV에서 봤던 고중력 훈련을 받는 전투기 조종사 같기도 하다. 원심가속기가 빙빙 돌며 중력이 여섯 배, 아홉 배 높아질수록 청년 조종사들이 순식간에 팔십 대 노인이 돼버렸다. 그렇네! 회사는 가속 노화 그라피티 플래닛이 맞았다! 지구별 중력에 맞는 얼굴 근육값 재설정을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볼에 바람을 넣었다 뺐다,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명량한 목소리가 한 평의 어색한 진공 상태를 콕 터트렸다.


  "저... 늘 보면서 에너지가 참 이쁘다 생각했어요. 이 말해주고 싶었어. 부담스러워할까 봐 고민하다 마침 둘 밖에 없어서... 하하하."

  띵-


  비스듬히 기울여 합장한 손이 나를 가리키는 것을 보니, 그 이쁘다는 에너지가 내 건가 보다. 마침 '띵'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를 움켜줬던 공기도 느슨해졌다. 칭찬 기브 앤 테이크에 충분히 사회화된 줄 알았는데 갑작스러운 멘트와 절묘한 타이밍에 열린 문 탓에 "에? ㅈ..어.. 요?"라는 불완전한 공명음만 새어나갔다. 요가원으로 총총 들어가는 그녀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다시 거울 속 내 얼굴을 살폈다. 불 옆에 뒀다 깜빡한 버터 조각처럼 예민하던 모서리는 무뎌지고 뻑뻑하던 형체는 흐물 해진 안면 근육이 걸려있었다. '띵'소리는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울린 것일지도. 자체 안면 스트레칭도 해결 못한 출퇴근 중력값 차이를 이름도 모르는 이의 다정한 한 마디가 순식간에 동기화를 완료했다는 알람 말이다.


  그나저나 늘 지친 얼굴로 들어왔다 땀에 절은 산발로 나가는데 대체 어디가 예뻤다는 건지. 게다가 우린 어쩌다 목례 정도만 하는 사이인데. 오늘은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했지만 평소보다 더 신경 쓰였다. 칭찬에 부응해야 한단 의식 탓인지, 칭찬 자체가 응원이 된 덕인지 오늘따라 들라는 가슴은 더 잘 들렸고, 말라는 골반은 더 잘 말렸다. 선 자세에서 폴더폰처럼 상체를 앞으로 숙여 두 손으로 종아리를 감싸는 우타나 아사나를 하는데 웬일로 코가 정강이에 닿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골반부터 윗가슴까지 밀어내 상체를 젖히는 우스트라 아사나를 하자 손이 발뒤꿈치를 여유 있게 잡았다. 전굴과 후굴을 오가는 시퀀스를 성실하게 대할수록 호흡만 남고 머리는 아득해졌다. 굽히고 젖히는 상체 따라 움직이던 시선이 전면 거울에 닿을 때 빨갛게 달아오른 두 뺨과 얼굴에 축축이 들러붙은 머리카락, 그리고 (회사에서와는 다른 질감의) 치열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내 모습이 새삼 타인처럼 느껴졌다. 거울 속 나도, 거울 속 나를 보는 나도. 그녀가 봤다는 나처럼.


  행복은 명주실로 야무지게 묶은 한 덩이 안심스테이크보단, 소고기 민찌에 다진 양파, 셀러리, 당근을 꾹꾹 뭉쳐 만든 고기 완자 같다. TV에 나온 어느 명문대 심리학과 교수가 그러던데 가까운 사람 한 둘과 깊은 관계보다, 일상에 스치는 다수의 무명들과 자잘한 경험의 합이 행복감을 더 좌우한다고 했다. 가령 앞 선 사람이 열고 나간 문을 나를 위해 잡아주고 있다던가, 이웃이 본가에서 보내왔다며 고구마나 귤을 나눠준다거나, 엘리베이터 없는 4층 현관문 앞에 택배 기사님들을 위해 놓아둔 간식 박스를 본다거나, 아님 그저 아침에 들린 카페 직원과 활기찬 인사를 주고받는 것 같은 작고 훈훈한 순간의 합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행복의 식감은 부드럽고 풍미는 다채로운가 보다. 나의 행복 완자도 그녀가 한 스푼 더해준 재료 덕에 오늘, 조금 더 크고 먹음직스러워졌다.


  들숨에 그녀에 대한 고마움이 들어찼다, 날숨에 부러움이 뱉어졌다. 이름도 모르는 옆 매트 아가씨에게 자기 안에 예쁜 감정을 전하려는 그녀의 천진한 용기가 부러웠다. 어떤 모양, 온도, 향기의 마음이든 그것을 드러내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런데 그녀의 문은 닫힌 적이 없었는지, 가벼운 바람에도 살랑하고 안을 활짝 열어 보이는 것 같았다. 문보단 실키한 커튼 자락에 더 가깝기도 하다. 어쩌면 그녀에겐 낯선 이와 기분 좋은 말 한마디 나누는 건 용기랄 것도 아닐지도. 이건 10분 안팎의 MBTI 검사로 정의하는 외향형, 내향형의 문제가 아니다. (나만 해도 집에서 혼자 뒹굴다 보면 오히려 병이 나버리는 외향형 80퍼센트니까.) 이것은 마음의 유연함 정도일 것이다. 타인의 좋은 점을 찾아내고 담아 둘 만큼 마음의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유연함. 그리고 그것을 쉽게 꺼내 보일 수 있는 가뿐함. 늘어난 용량만큼 또 다른 아름다움을 살펴 넣을 수 있는 공간감. 눈길을 끌던 그녀의 정갈한 몸태를 빚어낸 건 땀에 젖은 아사나 수련만이 아니라 여유 있는 마음의 순환 덕이 아니었을까.


  수업이 끝나고 평소보다 서둘러 매트를 정리했다. 땀에 젖은 매트를 닦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내 마음의 경첩도 살살 달래 본다. 다정한 한 마디를 꺼낼 수 있게.




우타나 아사나 : 학창시절 '나 이만큼 유연해'라고 친구들과 뽐낼 때 자연스럽게 하던 그 자세. '선 전굴 자세'라는 이름 그대로, 서있는 상태에서 상체를 숙여 손을 바닥이나 발목 뒤를 잡아 상체와 하체가 가까워지는 자세이다. 몸의 중심인 골반의 가동성이 좋아질수록 편안하게 할 수 있으며, 척추와 다리 뒤의 유연성을 길러주고 스트레스 완화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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