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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hee Sep 21. 2024

기적 같은 회복

이민생활 중 가장 큰 문제는 단연코 언어와 재정 문제 그리고 자녀양육이었다. 갈수록 영어의 장벽은 낮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아지는듯했고
재정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직업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학생의 상태였기에 갈수록 계획은 틀어져갔다. 어차피 세상은 초짜인 우리의 생각대로 흘러갈 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타격은 IMF였다.
그건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방향을 틀어버렸던 큰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지만 유학 중이었던 많은 학생들에겐 더욱 큰 사건이었다.
환율에 울고 웃는 자들 중엔 단연코 유학생이...

환율 급등으로 인해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쳤고 어찌어찌 나는 간신히 석사과정을 졸업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 생각해서 남편은 박사 수료를 한 채 귀국을 감행해야 했다.
그렇게 돌아와 각자 휴직 중이던 직장에 다시 복직을 하였지만 눈문을 마치지 못한 남편이 여름방학 동안 눈문을 마치고 졸업을 할 예정으로 미국에 들어갔고 갑자기 전공을 바꿔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정을 하는 바람에 모든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런 결정들 사이에서 아직 초1이았던 둘째는 별 타격 없이 자랐지만 중2였던 첫째는 감정적으로 불안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미성숙했던 우리 부부는 눈앞의 문제로 아이의 마음을 읽고 있지 못했다.

남편은 더 이상의 휴직을 원치 않아 사직을 했고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칠 것을 예상하여 나는 좀 더 한국에 남아있기로 결정을 했다.
첫째는 아빠가 돌보기로 하고 미국으로 보내고 둘째는 잠시 할머니집에 보내는 등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보내던 날들이었다.

아침 출근을 준비하고 나가면서 현관 앞에 신문을 집어든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911
신문 앞면에 실린 미국 쌍둥이 빌딩이 불길에 타고 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전쟁을 방불한 모습의 미국
뒤이어 그곳에 있는 남편과 아들.. 이 떠오르고.
이제 우리 가족은 만날 수 없게 되는 건가?
생이별하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나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행히 연락이 되었지만
당시 비행기도 뜨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반복적으로 불타는 쌍둥이 빌딩의 사진과 더불어 끊임없이 뉴스를 쏟아내는 통에  불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돈 몇 푼 더 모으겠다고 가족이 떨어져사는 건 의미가 없다고 여겨서
8개월 만에 휴직계를 내고 다시 미국으로 날아갔다.
사실 911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와 둘째는 한국에서 더 오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할까?
암튼 그렇게 가족이 다시 합체했지만 이미 기러기가족의 문제가 이미 태동이 되었고 그때부터 우리 가족에게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8개월 만에 만난 첫째는 사춘기에 들어서고 있었고
공부에 찌든 남편이 첫째를 돌보느라 엄하게 다룬지라 아이와의 갈등이 생각보다 골이 깊어있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데 아이들을 고려치 않은 실책은 생각보다 그 결과가 많이 컸다.

경제적인 불안, 정체성 혼란 등이 사춘기를 만나 그 시너지는 끝을 모르게 활활 타올라갔다.

첫째의 반항은 고1이 되자 하늘을 찌르고
집안에 냉기가 돌다 못해 전쟁발발 직전의 긴장이 한순간도 누구려 지지 않은 채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공부고 뭐고 아이가 돌아오기만을 눈물로 지새워야 했던 길고 긴 사춘기는 대학 1학년이 되어서야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춘기라도 훈육이 필요하다는 남편과

지금은 그 무엇도 아이의 귀에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나쁜 생각까지 한 적이 있으니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는 나와의 의견 충돌로 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다.

그렇게
육아에 대해 의견이 달랐던 남편과는 이혼 위기까지 겪어야 했고 그 사이에서 둘째는 눈치를 보며 자신은 저 놈의 사춘기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하며 나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암튼 그 사이 첫째는
집에서 차로 4시간 거리의 주립대학에 갔고

가끔 음식이며 용돈을 기숙사로 가서 전해주어야 했다.

 나는 장거리는 못 가니 남편에게 심부름을 보냈고

그때마다 한 번도 투정 없이 다녀오곤 했다.
아들 기숙사에 가서 물건을 전해 주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물건만 받아서 들어가는 아들의 등뒤에서 한숨을 쉬고 돌아온다는 남편의 말을 들으며
안쓰럽기도 하고 나와 양육의 결이 달랐던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물론 옳고 그르고의 차이는 아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1학년이 다 마쳐 가던 즈음이었을 거다.
그날도 무엇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언가를 전해 주려고 퇴근 후 갔다 오느라 밤 12시가 넘어가는데 전화가 왔다.
왜?
으응.. 흑흑
왜? 영수한테 무슨 일 생겼어?
아니.. 흑흑
왜 무슨 일이야!!??

으응
영수가 나 사랑한다고 말했어.. 흑흑

아들에게 물건을 전해 주고 기대 없이 돌아서는데 아들이

아빠.. 하고 불러서 돌아섰더니

아빠.. 사랑해..
했다고.

아... 감사합니다! 와 동시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1시가 넘어서야 도착한 남편은 오는 내내 울었다고 했다.

부모란...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음과 눈을 자식에게 빼앗기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런 사랑을 부모에게서 받았고
그 받은 사랑을 전해주는 자리가 부모의 자리이다.

잘못된 관계가 되기 전에 지혜롭게 살아야겠지만 이미 틀어진 관계라도 정성을 들여서 치유하고 회복하려 애쓴 남편을 칭찬한다.



그렇다고 그날부터 첫째가 천사가 된 것은 아니다. 다시 갈등도 생기고 불협화음도 일어났지만
그날부터 언 마음이 녹으며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 첫째가 중년을 향해 가는 나이가 되었다.
내 인생에 아빠는 없어!

난 아빠 땜에 집에서 먼 대학으로 가서 다시는 집에 안 올 거야! 단언하던 녀석은
이제 엄마보다 아빠와 더 많은 대화를 한다.
남자라 더 통하는 부분이 있나 보다.

그리고 가끔은

엄마! 아빠한테 좀 부드럽게 하세요! 하기까지!^^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보는 게 나는 너무 행복하고  내 인생에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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