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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열 Apr 19. 2024

산책길에서

 강아지를 앞세우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조금 늦은 터라 그늘과 함께하려면 집에서 조금 먼 곳의 산책로를 찾아야 한다. 차 문을 연다. 산책이라는 게 걷는 것인데 걷기 위해 차를 탄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기도 하고, 살짝 귀찮기도 하다. 차를 거치지 않고 어딜 갈 수 있는 게 참 좋은 거구나 싶다.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음악을 무작위로 재생시킨다. 적어도 산책길에서 만이라도 무언가를 선택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게 선택의 연속이다. 직업 선택이나 결혼 등의 큰 사안부터,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이걸 살까? 저걸 살까? 등등의 자질구레한 선택들. 산책의 시간은 선택의 시간이 아니라 편안함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솔 숲길에 접어든다. 매끈한 흙길이 맞이한다. 좋다 이런 길. 한 사람 한 사람이 밟아서 다져진 매끈함과, 다져졌음에도 발바닥에 전해오는 옅은 폭신함을 지닌 길.     


 소나무 사이를 비집은 바람이 옷깃을 건드리고 얼굴도 스친다. 과하지 않은 살랑거림이 좋다. 잠시 틈을 둔 바람이 또 얼굴을 스친다. 지금 이 바람은 좀 전에 지나간 바람과 같은 듯하지만 다른 바람이다. 좀 전의 시간이 지금과 같은 듯하지만 다른 시간이듯이. 바람이 평소엔 느끼지 못하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시간도 곁을 스쳐 지나간다.      


 벚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둑길에 올라선다. 흐드러진 벚꽃을 여윈 가지에 짙은 초록 잎이 매달렸다. 그 잎새를 용케 뚫은 햇살이 그늘 사이에 반짝인다. 소나무 숲에서 살랑이던 바람이 여기서도 살랑이며 벚나무 가지를 흔든다. 그 흔들림에 그늘 사이에 반짝이는 햇살도 이리저리 흔들린다. 흔들리는 건 점점이 반짝이는 햇살이지만 흔든 건 바람이다. 내 삶도 저렇게 무언가에 흔들렸을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라는 시구처럼 흔들리지 않고 쌓인 삶이 있겠는가? 어쨌거나 오늘 산책길엔 바람이 열 일을 한다.  

    

 벚나무 사이사이 벤치가 놓여있다. 비어있는 벤치는 쓸쓸하다. 그래서 아련한 느낌인가? 쫄랑쫄랑 곁을 걷던 강아지가 사람들이 앉아있는, 그래서 쓸쓸하지 않은 벤치로 다가간다. 귀엽다며 관심을 보인 탓이다.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쓱 내민다. 적정한 양의 귀염을 받고는 발길을 돌린다. 사람만 관심과 칭찬에 약한 게 아니다. 어쩌면 적정한 관심과 칭찬에 만족하지 못하는 쪽이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심과 칭찬뿐이겠는가? 재산이건, 명예건, 권력이건 만족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니.      


 이제 둑길에서 내려와 강가에 나 있는 길을 걷는다. 눈길은 자연스럽게 강물을 향한다. 흐드러지게 쏟아진 햇살이 물결 위에서 춤추듯 현란하게 반짝인다. 게으르게 흐르는 강물이 옅은 여울목을 만난 것이다. 저 빛남은 강물이 만든 것인가? 쏟아져 내린 햇살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수면 아래에 울퉁불퉁 숨어 있는 자갈과 경사가 만들어 낸 물결인가? 정답은 뻔하다. 저 혼자 빛나는 것이 있으랴.      


 차를 향해 걸어가는 보도블록 사이에 이름 모를 노란 꽃이 피었다. 그 억셈이 경이롭기도 하고, 홀로인 것이 외롭기도 하고, 홀로여서 예쁘기도 하다. 그렇다. 장미나 백합이나 양귀비처럼 화려하고 유명하지 않더라도, 벚꽃이나 이팝나무꽃이나 진달래꽃처럼 흐드러지지 않더라도 충분히 예쁜 꽃이 있다. 물론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긴 하지만.      


 집으로 향한다.      


 오늘 산책은 즐거웠을까? 편안했을까? 스멀스멀 피어나는 생각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걷는 산책길이었을까?


Ivan Lacković Croata-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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