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관념이나 관습이 그것이다. 분명히 잘못된 것 같은데, 또는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건 모든 건 변한다는 사실 뿐이라는 말처럼 세상은 항상 변하여 왔고, 변하고 있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다만 느낄 수 없을 만큼 천천히.
필사하는 게 어느덧 오랜 취미가 되었다. 매일 1시간가량, 마치 붓글씨 쓰듯 노트에 글자를 써 내려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펜글씨가 쓰고 싶은 거다. 잉크에 펜을 적셔서 글자를 쓰는 옛날 필기구 말이다. 요즘도 있으려나 하고 검색해 본다. …… 있다. 요즘도 이런 필기구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면서 펜과 잉크를 구매한다.
며칠이 지났다. 책상에 앉는다. 잉크로 펜을 적시고 글씨를 쓴다. 쉽지 않다. 잉크가 많았는지 노트에 뭉텅 떨어진다. 그래서 잉크를 조금만 적시고 글씨를 쓴다. 몇 자 쓰고 나니 잉크가 마른다. 글 쓰는 재미는 있으나 상당히 성가시다. 이래서 잉크가 마르지 않는 만년필이라는 게 생겨나고 볼펜의 세상이 됐구나 싶다. 필기구가 끊임없이 바뀌어 굵고, 얇고, 부드럽고, 딱딱하고, 지워지고, 지워지지 않고, 이 색깔 저 색깔, 이런 느낌 저런 느낌의 수많은 필기구가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필기구만 바뀌었을 리가 없다.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자동차로, 철커덩 철커덩 칙칙폭폭에서 바람의 속도를 내는 KTX로 이동 수단이 바뀌어 왔고, 초가집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거쳐 아파트로 주거 공간이, 라디오에서 TV로 노트북으로 태블릿으로 스마트 폰으로 미디어 매체도 다양화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사는 방법도 바뀐 것 같다.
이혼 전문변호사가 출연한 TV 프로그램을 본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생활비를 갹출하고 가사 분담도 공평하게 한단다. 한 편이 식사 준비를 하면 한 편이 청소하는 식으로 말이다. 만약 그런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혼 사유가 된단다. 부부가 경제공동체 또는 운명공동체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모든 부부가 그렇진 않겠지만 결혼에 대한 개념이 바뀐 건 확실한 것 같다.
변화가 느껴지는 것 중 하나가 제사 문화다. 자정이 지나서 지내던 것이 어느샌가 초저녁으로 바뀌었고, 합사 하는 집안도 많아졌다. 최근엔 명절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많단다. 관습도 바뀌긴 바뀌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판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고무신 한 짝에 표를 팔던 시대에서, 자유를, 민주주의를 외치며 투쟁하는 시기를 거쳐 조금 더 평등한 시대로. 누구나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그래서 가끔은 자기주장을 퍼트리고자 SNS를 통해 가짜뉴스를 유포하기도 하는 그런 시대로.
세상은 바뀐다. 달팽이 걸음처럼 더디게, 느낄 수 없을 만큼 느리게, 그리고 좋은 방향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다수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스링은 ‘더딘 변화를 불변과 혼동해선 안 된다.’라고 했다. 세상에는 불변 속에 안주하는 사람과, 몸속의 더듬이를 깨워서 느린 변화를 인지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 사는 일에 정해진 답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올바른 선택은 후자가 아닐까? 느린 변화를 잘 인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