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이름이 가장 어울리는 그녀들에 대해
"10년 뒤에 우리 모습을 상상해 봐"
"10년 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일까? 궁금해"
내 꿈의 시작과 끝, 어쩌면 나의 모든 것에 그들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이야기.
그녀들을 처음 보았을 때, 비교와 경쟁 속에서 자라온 나와는 달리 그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완벽하게 끝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에도 그녀들은 아주 여유로이 받아들이곤 했다. 처음에는 낯설었고, 그다음에는 부러웠으며 결국 나는 그녀들을 닮고 싶어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관계도 흘러 어느샌가 서로에게 '우리'라는 말을 당연하게 불러주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라서, '우리'이기 때문에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바다의 끝이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끝이 없을 테니까.
스무 살이 된 이후, 벚꽃이 피기도 전 계절이 봄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한국을 떠났다. 한국을 떠나 도착한 곳은 보랏빛 노을이 하늘을 뒤덮은 곳, 필리핀 일로일로였다. 친구를 사귀는 법이 미숙한 탓에 앞에 서 있는 친구에게 뜬금없는 질문으로 당혹시킨 나였고, 그녀는 얼떨결에 나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녀 역시 친한 친구가 없다고 했었고, 나는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필리핀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우리를 포함한 3명의 룸메이트를 만들어야 했다. 그녀 그리고 나. 한 명이 부족했다. 그러다 본인을 '트루디'라고 부르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렇게 우리 셋은 6개월간 서로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필리핀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기숙사에서는 한동안 귀신 소동이 일어났었다. 역시나 소문에는 거짓이 따르는 법이지만, 그 거짓은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쉽사리 사라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우리는 확신 없는 소문이 불러온 소동에 침대를 하나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친구가 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우리였음에도 그날 이후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자기로 결심한 것이다. 매일 아침 트루디는 침대에 나의 몸이 반 이상 들어와 있다며 투덜거렸지만, 밤이 되면 또다시 나를 껴안고 자던 친구였다. 공부 시간이 끝난 후에는 언제나 푹 빠져있던 아이돌 노래를 이어폰 없이 들으며 춤을 추고 노래하던 그녀였다. 시끄러웠고 난 그것이 좋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있었기에 355호는 언제나 웃음이 가득했으니.
대학생활 내내 그녀는 나의 옆자리였다. 맨 앞자리에서도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 때마다 그녀는 몰래 사진을 찍어댔다. 매주 주말이 되면 가장 가까운 카페에서 함께 공부를 하곤 했다. 집에서 쉬고 있을 때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배가 고프다며 귀찮게 하던 트루디. 고민이 늘어갈 때마다 쉼 없이 응원을 해주던 그녀는 때론 진지했고 속이 깊었다. 마음에 폭풍이 일렁이던 날에는 홍수가 나버린 마음에 물을 끊임없이 퍼주곤 했다.
아주 시끄럽고, 때론 진지하며 나를 걱정해 주던 트루디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안다며 자부하던 그녀. 부정할 수 없음이 우리 관계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아니, 그것이 더욱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였다.
일로일로 생활이 꽤나 익숙해졌을 때, 트루디는 또 다른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그녀와 똑 닮은 성격과 에너지를 가진 친구였다. 갈색머리에 빨간 입술 그리고 밝은 미소를 가진 그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샬롯. 그녀는 인사를 주고받은 적도 없던 우리에게 자고 가도 되냐며 해맑게 물었다. 밤새 그녀가 들려주던 이야기는 나를 졸리게 했다. 타인에게 관심이라고는 일절 없는 나에게 새로운 분위기였달까. 타인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는 것에 매우 게으르던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눈이 풀어지곤 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럼에도 그녀의 밝은 웃음을 절대 내칠 수 없었으므로, 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대학교 생활을 내내 함께한 후, 우리는 같은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린 우리가 떠들어대던 꿈에 함께 도달할 수 있었다. 더욱 성숙해진 그녀는 여전히 이야기꾼이었다. 재잘거리며 환하게 웃는 그녀는 역시나 7년이 지난 후에도 나를 졸리게 했다. 하품을 수없이 하며 듣는 그녀의 이야기가 지루하면서도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잠이 들 때까지 그녀가 나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 어쩌면 그건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것이었을지도. 웃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를 점점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을지도.
(2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