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을 헤엄치던 추억들의 그리움
오랜 시간 체취와 때가 묻은 물건들. 애정과 추억이 함께 묻어버려 '나'라고 착각을 하게 하는 물건. 누구에게나 그런 물건들이 있다. 사연이 담긴, 추억이 담긴 그리고 결코 버릴 수 없는 집착이 담긴 그런 물건.
드라마나 영화에서 '엄마가 남기고 간 유품'이라는 사연으로 주인공의 물건을 보여준다. 그 물건은 주인공의 세월을 시청자들에게 소개해주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인연과의 시작을 알려주기도 한다. 주인공이 그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타인에 의해 훼손이 되기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질 듯 주저앉아버린다. 마치 그 물건이 주인공의 전부인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물건들이 있다. 여러 가지 사연이 담겨있고, 누군가에 의해 버려지기 전까지 내 손으로 버릴 수 없는 것들. 내가 버린다는 건 그 사람과의 추억을 영원히 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저려오는 그런 물건 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할머니 집에는 텔레토비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가 있다. 여름 방학마다 할머니집을 갈 때면 이부자리에 그 베개가 놓여있었다. 몸집이 아주 작을 때부터 몸집이 그 베개의 몇 배로 커질 때까지 그것은 나의 것이었다. "할머니, 내 베개!"라는 말 한마디면 온 가족이 그 베개를 나에게 가져왔다. 그러다 중학생이 된 이후로 여름방학이 바빠졌고, 더 이상 할머니집을 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사촌동생들이 태어나기 시작했고 그 베개는 자연스럽게 동생들의 것이 되었다. 베개가 빼앗기는 게 아니라, 사랑이 빼앗긴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나는 속이 상한 적이 많았다. 그 베개를 떠올리면 여전히 나는 너무나 그립다.
"할머니 매미 소리 또 내줘!" 라며 할머니를 귀찮게 하기도, 할머니를 웃게 하기도 했던 여름이.
어느 날 집에 있던 돌고래 베개가 없어졌다. 아빠는 집에서 '상어' 역할이었고 돌고래는 나의 친구였다. 매일 밤 돌고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내 옆에서 자도록 했다. 엄마에게 혼이 나 울 때에도 돌고래는 늘 내 편이었다. 햇볕에 오래 둔 돌고래 인형의 향기는 포근했다. 그렇게 인형을 끌어안고 햇볕아래에서 낮잠을 잤었다. 몇 년이 지나, 노란색 큰 봉투에 돌고래 인형이 들어가 있는 걸 보았다. 겨우 다섯 살이었던 나는 아무 의심 없이 바라만 보았다. 며칠 뒤, 엄마에게 돌고래 인형의 행방에 대해 물어보았고 엄마를 대신해 아빠가 답을 해주었다. 아빠는 돌고래 인형이 오래되어 버렸다고 했다. 분명 아빠가 버린다고 물었을 때 장난감 놀이를 하다가 건성으로 '응'이라고 했을 테다. 본인이 동의를 했단 걸 알리가 없는 다섯 살짜리 어린이는 가장 친한 돌고래 친구가 사라졌다는 말에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스물일곱이 된 지금도 여전히 생각나는 돌고래 인형의 눈망울. 그 후로 아빠가 몸집만 한 쓰레기봉투를 꺼낼 때마다, 나는 아빠를 피해 나의 물건들을 안고 다녔다. 웃기지만 지금까지도.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어버이날을 맞아 친할머니 집에 갔었다. 친구와 놀고 싶은 마음이 컸던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마주했다. 할머니는 나를 계속해서 껴안았고 돌아가는 길목에 발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우리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할머니의 마지막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여전히 그날의 할머니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다. 그렇게 할머니가 남기고 간 할머니의 반지. 그 반지가 할머니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떨어진 곳을 잇기 위해 천으로 감싸고 또 감쌌던 걸까. 낡아진 천으로 감싼 반지를 보며 매일을 울었다. 우리 집 서랍에 보관돼 있는 할머니의 유품을 손에 끼우면 할머니 손을 잡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집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는 할머니의 반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가끔 할머니의 생일이 다가올 때 꺼내어본다. 그렇게 할머니가 남기고 간 반지에 나의 후회와 사랑들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움에 목이 매이는 날, 할머니가 나를 찾아올 수 있도록 영원히 버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버려지고 새롭게 생겨난 물건들은 내 추억을 따라다녔다. 기억 저편에 감춰진 추억들을 되감기하며 다시 보여주는 건 다름 아닌 '물건'이었다. 추억이 깃들어 있는 물건들을 향한 마음은 어쩌면 그리움에 대한 집착일지도.
그 물건이 내 눈에서 사라지는 순간,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결국 찾지 않게 되니까. 그럼에도 나는 추억을 들추고 싶을 때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물건을 찾아본다. 내가 잊고 있던 그리움을 추억하기 위해.
그렇게 기억 속 존재하던 그들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