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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해부 : 친구 (2)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by 이가은

6개월간의 필리핀 생활을 끝마치고 우리는 말레이시아에 있는 학교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한 달간 한국에 머문 후 가게 된 말레이시아는 필리핀과는 달리 셀렘이 앞섰다. 설렘에 이끌린 탓에 인사를 해본 적도 없는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다. 나로서는 신기한 일이었다. 동그란 눈에 날렵한 턱선 그리고 오후 3시의 햇살 같은 나른한 목소리를 가진 친구였다. 그녀의 목소리로 듣는 모든 단어들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차분했고 때론 재미있었으며 내가 아주 좋아하게 될 것만 같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첫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우리는 한식을 안주삼아 파티를 하기로 했다. 한 집에 옹기종기 모여 시작된 파티는 달이 잠들어 태양을 깨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로도 종종 파티를 했고 덕분에 서로를 알아가기에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모임이 끝이 나고 모두가 흩어질 때, 내 침대에서 다음날을 맞이하던 친구가 있었다. 오후 3시의 햇살 같은 나른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 제니퍼였다. 그녀는 자주 악몽을 꾸곤 했다. 밤새 무서운 악몽이 그녀의 침실을 덮친 어느 날,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 당분간 너희 집에서 자도되?"

그 당분간이 언제까지일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말한 '당분간'이라는 단어의 뜻이 '꽤 오래' 였기를 바랐었다. 각자 할 일을 하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쯤 그녀와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좋았다. 한참 이어지는 대화를 멈추게 하는 꿈나라가 좋았다. 아침이 되어 내가 잠에서 깨기도 전, 그녀는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제니퍼는 우리 집에서 잘 때 악몽을 꾸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니퍼는 알았을까? 그녀가 나의 불면증을 없애줬다는 사실을. 잠에 들지 않아 뒤척이던 밤들에 그녀가 함께했을 뿐이었지만, 나의 불면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녀의 '당분간'이 더욱이 '꽤 오래' 이기를 바랐다.
외계인, 우주의 끝, 예언자 등의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던 나에게 그녀 역시도 흥미롭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신감이 떨어지던 날 나의 어깨가 처진 걸 보면 조심스레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봐주던 그녀였다. 야식이 먹고 싶은 늦은 밤, 떡볶이를 해 먹자는 나의 말에 당장이라도 달려온 제니퍼였다. 다 함께 술을 마시면 먼저 잠에 들지만, 우리의 대화에 잠결에도 대답을 해주던 속 깊은 친구였다. 아주 가끔 악몽을 꿀 때마다, 술을 마시고 일찍 잠에 들 때마다, 어느 날 밤 불면증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그녀가 보고 싶어 진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을 사랑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사랑했다. 제니퍼라는 이름까지도 사랑했다.

이 모두를 알게 되기 전, 가장 처음 알게 된 친구가 있다. 친구가 없어 두리번거리던 내 앞에 서있던 그녀. 검은색이 콘셉트인 듯 세련되게 옷을 입고 서 있던 그녀. '저스틴비버 좋아해?' 그녀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그녀의 대답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 순간이 여전히 웃기다며 가끔 이야기한다.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고도 웃으며 반겨준 그녀의 이름은 '미미' 다. 이름과 닮은 귀여운 모습과 똑 부러지는 성격. 그녀는 가끔 내게 언니 같은 존재였고, 동생 같기도 했으며 낯선 필리핀을 설렘으로 가득 채워준 사람이었다. 필리핀에 도착 후, 서로를 알아가려 한 우리의 첫 대화는 이상하고 웃겼다. 겨우 인사만 하는 영어실력을 숨긴 채 우리는 서로 본인이 영어를 가장 못한다며 기대감을 낮추려 애를 썼기 때문이다.
"내가 더 영어 못해. 나는 정말 꼴찌일 수도 있어."
"너 거짓말하지 마. 내가 진짜 진짜 못해. 정말이야. 네가 꼴찌면 나는 너 다음 순위일 거야."
어학원에 등급과 분배된 반이 공개되던 날, 우리는 서로를 보며 빵 터지고 말았다. 우리의 대화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분배된 반에는 그녀와 내가 함께 배정돼 있었다. 하루 종일 웃다가도 '꼴찌'라는 말에 심각해지곤 했다.
"나 부모님한테 말 못 해..."
"나도.."

그 이후로 우리는 아침 8시부터 밤 10시,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끝나서까지 2시간을 더 공부하곤 했다. 6개월간 그녀와 나는 선의의 경쟁자였으며 조력자이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잘하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점점 실력이 늘었고, 대학생활 내내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우리는 우리가 꿈에 그리던 항공사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말하곤 한다.
"나는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왔을까 싶어."
그녀는 어느 날 마법처럼 나타나 내가 꿈에 도달하도록 해 주었다. 나를 성장시켰고 나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선망하는 모든 것에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의 성장 이야기에 늘 그녀가 함께했기 때문이다. 내가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닮으려 한 모든 것의 시작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멋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세상에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낡고 해져도 여전히 아름답다고 해줄 친구가 있느냐고 스스로 묻는다면,
물론 나의 대답은 긍정이다.
나 역시나 그녀들의 세상 속 수많은 시간이 지나간 자리가 낡고 해진다고 하여도, 여전히 가장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정말 그녀들은 그러하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그녀들의 흰머리가, 그녀들의 세월이, 그녀들의 느린 걸음걸음이 가장 아름다울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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