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계절의 속도가 천천히 흐를 수만 있다면
아주 추운 겨울의 어느 날, 눈이 소복소복 쌓인 곳에 발자국을 선명히 남기는 너를 보며 나는 그 해의 겨울을 버텨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수많은 그리움들 중 너에 대한 그리움으로 며칠간의 밤을 온통 눈물방울로 채웠었다.
몇 개월 만에 본 너의 코는 색이 바래졌고 몇 개월 전 보다 걸음이 약간 느릿해졌으며 나를 어색해하면서도 나의 향기에 기대 잠에 들곤 했다. 너의 계절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지만, 나의 계절은 느릿하다 못해 너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우리의 속도를 맞춰나갈 수만 있다면 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될 테지. 그러니 너의 계절에게 오늘도 부탁해 본다.
"조금만 천천히 가줄 수 있겠니?"
무더위가 여름의 시작을 알리기 전, 흰색 털에 온통 까만 먼지와 흙으로 뒤덮인 강아지가 엄마 회사로 걸어 들어왔다.
평소 동물을 좋아하는 엄마와 아빠는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지만 그 강아지의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었다.
"안녕? 너는 어디에서 온 거니?"
엄마의 물음에 그 강아지는 똘망하고 슬픔에 찬 눈으로 엄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빠는 작은 가게에서 소시지를 사 온 후 먹였고 그 강아지는 몇 날 며칠을 굶었다는 듯 빠르게 먹어치웠다. 푸들 같기도 비송 같기도 한 예쁜 모습이 이렇게 엉망이 될 때까지 이 아이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떠돈 걸까. 엄마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버려졌거나 혹은 누군가 애타게 찾고 있거나. 확신에 찬 엄마와 아빠는 유기견 보호소에 연락을 했고 그 강아지는 보호소로 가게 되었다. 그 아이가 머물었던 자리를 바라본 엄마는 그날 이후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가은아, 우리 강아지 키울까? 아니, 지금 당장은 아니고... 혹시나 그냥 물어보는 거야."
"강아지? 너무 좋아!!"
"응 그래. 그런데 진지하게 생각해야 해. 생명을 키운다는 건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거야. 할 수 있겠어?"
"해볼게! 나 할 수 있어! 그런데 갑자기 왜 강아지를 키우려고? 엄마 절대 안 된다고 했었잖아."
"사실.... 마음에 걸리는 아이가 있어서...."
엄마 아빠에게 찾아온 첫 강아지였다. 그날 그 강아지가 엄마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어쩌면 이미 엄마의 마음은 그 아이를 사랑하기 시작했을지도. 그렇게 며칠 후 보호소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전에 유기견을 데려갔던 보호소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칩에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하고 강아지에 대해 물으니 대답이 없으시더라고요. 그 이후로 여러 번 다시 전화를 했지만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혹시 입양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한 달이 지나서까지 이 아이가 입양되지 않으면 안락사 결정이 날 수도 있습니다."
보호소의 연락을 받은 이후 엄마의 불면증은 더욱 심해졌다. 온종일 그 강아지를 생각할 뿐이었다. 해야 할 일들을 뒤로한 채 엄마 아빠는 보호소에 있는 아이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모든 강아지가 반갑다며 꼬리를 흔들었지만, 그 아이는 풀이 죽은 채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학대의 흔적과 떠돌이 생활 당시 찢어진 살. 잘린 꼬리들이 보였다. 엄마는 그 모습에 눈물이 나는 것을 겨우 참고서 바로 입양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 아이가 온 첫날 큰 베개 두 개를 이어 붙여 담요를 깔아주었다. 미숙한 솜씨로 준비한 여러 개의 인형과 장난감들을 주변에 놓고는 그 강아지가 마음에 들면 좋겠다며 설레어했다. 그 강아지는 그날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그 아이를 안아주며, 놀아주며, 재워주며 쉬지 않고 이름을 불러댔다.
"따롱아!"
몇 개월 후 그 이름을 불렀을 때 처음으로 그 아이가 돌아보았고 온 가족이 하루 종일 그 일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따롱이 혹시 천재견이 아닐까? 이렇게 빨리 자기 이름을 안다고?"
우리는 따롱 이만 보였다. 모든 삶이 그 아이 중심으로 흘러갔다. 모든 대화들에 그 아이의 이야기가 없으면 지루할 만큼.
모든 여행은 애견 동반이 필수가 되었고, 식사를 할 때에는 강아지가 먹을 수 있는 것이 포함이 되어야 하고, 주말은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시켜주려 했다. 그 아이가 행복한 것은 결국 우리의 행복이기에.
8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그 아이가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따롱이의 냄새가 있는 곳이 우리 집이 되었다. 이 사랑을 평생 지켜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아이의 털 색을 닮아가는 코와 눈이 여전히 사랑스럽다. 만족스러운 식사 후에 내뿜는 방귀가 아주 사랑스럽다. 귀찮게 할 때마다 나를 노려보며 한숨을 쉬는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많이 사랑스럽다. 이것들을 지켜내고 싶다. 흘려보내고 싶지가 않다. 그 아이의 계절의 속도가 조금만이라도 천천히 흐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영원히 서로의 향기에 기대어 잠에 들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