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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해부 : 세월

세월은 계속 흐르며,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다

by 이가은


듬성듬성 자란 숲들 사이로 소나기의 흔적들이 넘실거린다. 부족한 잔디들을 탓하며 흙들은 질퍽여지고 볼품없이 뒤엉킨다. 해가 들기도 전에 천둥번개가 몰고 오는 비구름에 숲은 겁이 나 움츠러들 뿐이었다. 하염없이 쏟아질 것만 같은 회색빛 구름을 올려다보던 숲은 다시 올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움츠러든 숲이 다시 울창해지기를 바라며.


내가 태어난 후 네 살이 되기까지의 기억들은 전부 사라졌다. 뇌의 한 부분 혹은 기억 저장소의 한 조각만큼 차지할 기억들이 아주 가끔 궁금하다. 할 줄 아는 말이 없어 괴성을 지르며 울던 그날 밤도,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뒤로 고꾸라지던 낮도. 그들의 사랑에서 피워낸 나의 시작이 어느샌가 희미해져 갔고 내가 그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엔 기억의 흔적조차 사라졌다. 그러다 언젠가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사촌동생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뱃속에서 어땠는지 기억나?"

그 아이는 말똥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웅크리며 누워버렸다. 나는 다시 살며시 질문을 했다.

"뭐 하는 거야?"

그 아이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시 나를 바라보았고 드디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 이렇게 하고 있었어."

몇 초간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신비하고 경이로운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그 아이의 말들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 말들을 잘게 다져 삼켜 넣고서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다 자란 어른의 모습으로 엄마의 품에 안겨 물었다.

"나 아기 때 어땠어?"

엄마는 지긋지긋하다는 손짓으로 나를 밀어내려 하면서도 팔을 굽히며 안으려 했다. 음... 하는 소리와 함께 몇 번째 기억쯤 나의 모습이 있었는지 찾아보는 듯했다. 책의 페이지를 마침내 찾았다는 듯 몸을 움찔거리며 입을 열었다.

"시끄러웠지. 많이 울어서 내가 잠을 못 잤지. 짜증이 확 나면서도 네가 자는 모습을 보면 천사 같고 이쁘더라니까?"

"사촌동생이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가 기억이 난데."

"그래? 어디서 그림으로 본거 아니고?"

엄마는 나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역시나 엄마도 엄마의 태어난 직후의 일을 다 잊은 모양이다. 사람이라면, 세상에 적응된 인류라면 그때의 기억은 없을 테지. 그 순수함이 얼마나 예뻤는지, 해장국을 먹으며 탄식을 뱉는 나의 모습이 원래는 새하얀 아기였다는 것도. 기억할리가.


나의 기억은 네 살 이후로 시작된다. 마치 나의 세상이 네 살 이후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처럼. 아빠가 서서 나를 아래로 내려다볼 때, 나의 키는 겨우 아빠의 뻗어진 손끝에 닿이는 정도였다. 앉아있기도 힘들 만큼 엄마의 배는 부풀어있었고, 겨우 잠이든 엄마를 깨우지 않으려 우리는 노력했다. 아빠가 목욕을 하는 동안 나는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그러다 좁은 화장실에 늘어뜨린 욕실용품들이 기울며 옆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지진이었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나와 엄마를 급히 깨웠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빠에게 업혀 아파트 밑으로 내려갔다. 5층 아파트의 맨 꼭대기에서 1층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흔들리는 아파트에서 벗어나 아빠를 바라보았을 때 그제야 아빠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 숨에서 불어온 향기는 사랑이었다.


우리는 더 큰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신축 아파트 13층이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나는 초등학교를 가게 되었고, 엄마아빠는 더욱 바빠졌다. 거실에 놓인 큰 책상에 앉아 수학 숙제를 하고 있으면 바람의 괴성이 들려왔다. 나는 무섭지 않았다. 옆집과 아랫집에 친구들이 살았고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였기에. 엄마 아빠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면 친구들의 집에서 밥도 먹고 놀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는 폴더폰, 슬라이드 폰 등 새로운 시대가 찾아올 것처럼 들썩거렸다. 커플폰이라며 아빠가 사들고 온 휴대폰에는 '넘버원'이라고 저장된 사람이 있었다.

"아빠, 넘버원이 누구야?"

"엄마지."

"왜 넘버원인데?"

"넘버원. 1번이니까. 일순위 같은 거."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1번과 엄마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넘버원. 그 후로 나의 휴대폰 속 엄마는 '넘버원'이 되어있었다.


중학생이 된 후, 나의 방 문 틈은 넓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빠의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래기라도 하면 짜증이 났다. 사실 아빠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방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을 테지. 건네 볼 말들을 하루 종일 생각했을 거다. 언제나 엄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딸과 그 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의 사이에서 등이 터져버렸을 테다. 나의 숲에는 가뭄이 찾아왔고, 엄마 아빠가 비춰주는 햇살들이 내 숲을 더 메마르게 했다. 환한 해일 수록 나의 나무들은 더욱 반항하며 메말라버렸다. 메마른 숲을 살린 건 친구들이었다. 내 숲을 지키기 위해서 친구들을 만나야 했다. 그들은 나와 똑같은 숲을 가지고 있었고, 숲을 살리는 법도 알고 있었다. 그사이 엄마 아빠에게 의지로는 일어설 수 없는 일들이 생겼고, 나는 모든 것들이 숨 막히기 시작했다. 독서실의 캄캄한 곳이 좋았다. 숨어서 울 곳이 필요했다. 나의 눈물로 이 숲에 홍수를 낼 거라며 소리치던 어느 날의 밤, 나는 눈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숲은 이미 무너져있었기 때문에.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 가뭄이 지나간 자리에, 이미 불타고 없어진 자리에 더 이상 숲은 자랄 수 없었으니.


엄마의 숲에 다시 나무를 심기로 온 가족이 결심한 지 3년이 지나고, 우리에게는 소중한 인연이 찾아왔다. 유기견이었던 아이가 우리의 가족이 된 이후, 흩어져있던 우리의 숲은 하나가 되었다. 이 아이가 드넓은 곳에서 뛰어놀 수 있게 숲의 크기를 키워갔다.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유학을 가게 되었다. 동시에 아빠의 사업은 커지게 되었고 우리 가족에게는 봄이 찾아왔다. 우리의 반려견, 따롱 이를 중심으로 우리의 대화는 밤새 흘러갔다. 되려 지쳐버린 따롱이는 우리 사이에서 잠이 들곤 했다.


나에게도 사랑이 찾아오고 그와 함께 이십 대의 전부를 보내며 가끔 아빠의 저장목록을 떠올린다. 바스락 거리는 이불이 포근한 듯 꼬옥 안고 자는 그를 바라보며 아빠의 '넘버원'을 생각한다. 아빠가 말한 '넘버원'의 의미를 그에게 대입해 본다. 그 순간 마음이 아려오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에 슬픔은 없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그것은 너무나 뜨거웠고 마음은 타들어가듯 더욱 저려왔다. 그들의 사랑으로부터 탄생한 나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나의 세월 속에는 그들의 젊음이 있었다. 그들의 사랑도 깃들어있었다. 지진 속에서 우리를 데리고 내려온 아빠의 안도,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려했던 그들의 욕망, 서로를 '넘버원'이라 말하던 그들의 으쓱임. 이건 사랑이었다.

이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었다.


듬성듬성 자란 머리칼 사이로 세월의 흔적들이 춤을 춘다. 부족한 머리칼을 탓하며 내 젊음은 질퍽여지고 볼품없이 뒤엉킨다. 한없이 작아지는 어깨 자락에 툭 하고 떨어지는 또 한 자락의 머리칼.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추억들이 나를 감싸 안는다. 세월의 끝에 다시 메마를 나의 숲은 어디론가 사라질 테고, 그 숲이 안고 있던 사랑은 남모르게 흙과 함께 묻히겠지. 그러나 그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숲을 만들겠지. 신비로웠던 우리들의 세월을 그리워하겠지. 젊은 날의 추억을 간신히 움켜쥐겠지. 그러나 또다시 오늘을 살겠지.


어차피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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