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비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은 정수리에 닿을 것만 같았다. 먹구름은 하늘을 한 입에 삼켜버렸다. 여름이 몰고 온 습기의 출처를 분명하게 밝히듯. 좀처럼 여름의 끝이 보이지 않았고, 여름옷이 부족하다며 투덜대는 동안 가을이 찾아왔다. 잎사귀들이 저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새 단장을 시작했다. 단풍이 한가득 물들 때 맞이할 생일의 주인공이 궁금해졌다. 계절의 문턱에, 계절의 품 속에 어떤 사람들이 태어났을까.
"야 내 생일파티에 놀러 올래?"
초등학교 3학년, 나는 첫 학기의 시작과 동시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어울리며 처음으로 나의 생일 파티에 초대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신이 났고, 생일파티에 놓일 음식들에 대해 물오보 곤했다. 생일파티가 시작되는 날, 그제야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내 생일파티에 친구들 초대했어!"
"친구? 생일?"
영문도 모른 채, 엄마 아빠는 모든 일들을 뒤로한 채 장을 보러 갔다. 아빠표 햄말이 주먹밥과 샌드위치. 시간을 탓하며 상의 반을 채운 치킨과 피자. 부엌에서 잘 나가는 식당의 셰프들처럼 분주히 움직이는 엄마 아빠와 그저 신이 난 딸. 비가 온 후 벚꽃이 떨어지는 시기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처럼 엄마 아빠는 나의 생일을 끝내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5월의 봄은 요란스럽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된 후,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그 친구의 부모님은 언제나 바쁘시고, 동생은 아프다고 했다. 언제나 공부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생일파티라니. 생일케이크에 초를 분 후 식탁에 놓인 음식들을 먹으며 물었다.
"혹시 더 오는 친구들 있어?"
"아니, 너만 초대했어."
"정말? 고마워."
특별해진 기분이었다. 언제나 반 친구들의 절반을 초대하던 나의 생일파티와는 달리 소박하던 그 아이의 생일파티. 가장 조용하고 소박했지만 너무나 특별했던 그 아이의 생일. 그 아이의 날에 내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이 케이크처럼 달콤했다. '민경이랑 친하구나!' 라며 기쁘게 나를 반기던 어머니. 워낙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라서 친구를 초대한건 처음이라고 했던 어머니. 오늘의 생일 주인공이 나인 것처럼 내 앞으로 음식들을 한가득 밀어주던 어머니. 파티의 끝무렵까지도 간결하고 단출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던 날. 고장 난 벽난로 앞에서 담요를 나눠 덮는 듯한 겨울이었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날, 함께 다니던 친구들 중 생일인 아이가 있었다.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 많았던 탓에 숙소 배정은 우리 모두가 당첨될 수 있었다. 소등시간된 후 우리는 조심스레 케이크를 준비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케이크를 커냈다. 라이터가 없던 탓에 촛대는 허전하게 꼽혀만 있었다. 생일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우리는 그 아이가 놀래길 바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선생님이 소리쳤다.
"이 녀석들! 조용히 안 해? 얼른 자!"
우당탕탕! 우리는 급히 불을 크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마치 선생님이 문을 뚫고 들어와 우리를 납치하는 외계인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터지는 심장을 잡으며 기다렸다.
"얼른 자! 선생님 간다!"
우리는 살며시 불을 켰다. 문 밖으로 멀어지는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시작된 생일파티. 그런데 케이크의 반이 움푹 파여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 짧은 소동에 내가 케이크를 밟아버린 것이었다. 아이들은 나의 모습과 케이크를 번갈아보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생일 주인공은 더욱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한여름에도 산 정상에 눈이 내렸다는 뉴스만큼이나 쫄깃하고 어처구니없는 초록빛의 여름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2015년의 시작, 알고 지낸 오빠의 생일 선물을 사려 시내에 나갔다. '망고 생크림폼'이라고 쓰인 제품을 집어 들었다. 폼클렌징이 필요하다는 오빠의 말에 적격인 선물 같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선물을 사는 게 이상할 만큼 어색했다. 그동안 서로의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었고, 아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메모지에 짤막한 편지를 남겼다.
[생일 축하해. 다음에는 편지지에 써줄게.]
'다음'이라는 말이 나를 간지럽혔다. 다음 생일을 챙겨주게 될까. 다음에도 오빠를 보게 될까. 그럴 일이 없을 텐데. 어쩌면 오늘 이후로 평생 안 볼 사이가 될게 뻔했다. 노란색 패딩을 입고서 선물을 챙겨 나갔다. 멀리서 보이던 오빠는 초록색 패딩을 입고 있었다. 멀리서 눈이 마주쳤지만 인사할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눈만 마주치고 있자니 어색함이 감돌게 뻔해서였다. 멋쩍은 몸짓으로 오빠는 걸음을 옮겼다. 어색한 미소로 선물을 주며 오빠를 올려다봤다.
"자."
"어. 고마워."
짧은 선물 증정식 이후에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오빠는 폼클렌징 후기를 알려주며 연락을 이어갔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나의 편지지에 쓰였던 '다음'이 '시작'이 될 거라고는. 벚꽃이 살랑살랑 마음을 간지럽히던 봄처럼 2월의 겨울은 간지럽고 어색했다.
여름의 기운이 시원해지면 우리는 가을이 오고 있다고 직감한다. 더운 바람을 비집고 스쳐가는 시원한 바람에게 인사를 한다. 계절의 문턱에 엄마의 생일이 있고, 계절의 품 속에 아빠의 생일이 존재한다. 무심코 걷던 여름의 끝자락, 가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곧 엄마 생일이야."
계절이 스쳐가는 것도 뉴스로 알게 될 만큼 바쁜 일상이 이어졌고, 달력을 펴 볼 시간이 없었던 탓이었다. 가을의 속삭임이 아니었다면 엄마의 생일을 놓칠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매일매일 엄마의 생일을 생각했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사놓고 엄마의 미소를 상상했다. 온 가족이 촛불을 둘러싸던 날, 촛불에 비친 엄마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한강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동시에 고요히 다리를 건너는 전철처럼 아득하고 나른한 가을과 겨울의 사이였다.
365일 중 365번의 생일이 스쳐 지나간다. 수십 번의 생일을 보내다 보면 어느샌가 나의 생일조차 잊을 때가 있다. 지나간 생일도 다가올 생일도, 그리고 잊힌 생일조차 계절이 끌어안는다.
'늦었지만 축하해' 라며
봄의 벚꽃이 흘러내린다.
여름의 소나기가 잔디를 적신다.
가을의 낙엽이 소리 내어 바스러진다.
겨울의 눈꽃이 어깨에 내려앉아 서서히 녹는다.
[향수병 해부학을 연재하는 동안에 엄마 아빠의 생일을
함께할 수 있음을 기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