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짱이었던 그 아이가 부장님 반으로 옮겨지고, 나는 잠시 편안함을 얻는가 했다. 나에게는 눈을 부라리고 걸핍하면 반항을 하던 그 아이는 남자 선생님의 굵은 목소리 한 마디에 순한 양이 되었다. 물론 부장님의 생활지도 영향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그게 성별차 때문인 것 같았다.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던걸까, 그 해에는 후회를 많이 했다. 1남 3녀 중의 막내딸로 세상에 태어났을 때 엄마는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할머니의 채근에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내가 자라 교사가 되서 이런 고초를 겪을 것을 알고 미리 그렇게 슬퍼했을까.
그때 맡았던 학년의 아이들은 유난히도 거친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젊은 여자였던 내게 관심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미친 일이지만, 내가 지나가면 당시 유행하던 릴러말즈의 노래를 불렀다. 릴러말즈의 가사는 이랬다. 엉덩이가 큰 그녀는 내가 좋다고 말했어, 너는 선생 나는 학생…
다른 반의 남자아이는 우리반 앞문으로 와서 내가 있는 것을 보고 우리반 남자아이에게 말했다.
“ 야, 너네 반 선생님 가슴 커?”
그 말을 듣고 수치심에 교장실에 내려가 사실을 보고한 내게 교장이 말했다.
“ 선생님 가슴 커? 그 말 가지고는 교보위 열 사안이 안될 것 같은데?”
교감과 상담교사는 말했다.
“선생님 옷차림이 문제가 될 수 있어. 공무원의 의무 중의 품의 유지의 의무가 있거든. 그러면 선생님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어.”
역겨운 한 해를 살았다. 학교 어른 중 나를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나를 도와줬던 옆반 선생님은 학부모 민원으로 담임 교체를 당했다. 이 일은 몇 년이 지나도 내 가슴에 박혀있다. 아이들은 그럴 수 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내게 상처로 기억되는 것은 그때 관리자들의 대처였다. 어른은, 승진해서 관리자도 된 그 교사들은 그러면 안 됐다. 그 상처받은 가슴으로 나는 조금 용기를 내기로 했다. 뉴스 인터뷰를 나가고 당시 나에게 폭언을 했던 관리자에게 사과하라는 문자를 보냈다. 녹음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말로 사과를 받아냈다. 이렇게 헤집어진 마음으로 용기를 낸 것을 단단해지고 있다고 말해도 될까. 이게 내게 조금의 도움이라고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나처럼 상처입고, 도움이 필요한 어린 교사가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 이를 도와주겠다고. 그때 나의 동료들처럼 모른 척 하고, 침묵하지 않겠다고 나는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