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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레디 May 25. 2024

다채롭고 입체적이고 복잡하게 착한?

 모든 동물 사이에는 서열이 있다. 인간도 동물이다. 인간이 둘 이상 모이면 그 곳에는 서열이 생긴다.


 교사라는 직업은 사람들로 둘러쌓여있다. 내가 학교에 가면 만나는 사람들은 지금 어림잡아봐도 백 명이 넘는다. 아침 출근길에 슬쩍 눈치를 보며 지나가야 하는 행정실과 교장실을 넘어, 2층으로 넘어간다.(+5명) 2층에는 1,2학년 교실과 6학년 교실이 있다. 2학년 아이들은 아침 시간부터 악을 지르며 복도를 뛰어다닌다.(+60명) 계단 살 사이를 잡고 요기저기 정글짐을 헤치듯 넘나든다. 복도에 앉아있고 누워있는 아이들을 보면 8살, 9살짜리 아이들은 아직 학생이라기보다 찰흙덩이에 가깝다.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쏘아봐도 아이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내가 예뻐서 쳐다보나봐! 싶은 얼굴로 한번 더 재롱을 부린다. 오후 1시까지 고생할 2학년 선생님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마음 속으로 건내며 반으로 들어간다.


6학년 우리반에 들어가면 20명의 아이들이 있다.(+20명) 6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찰흙으로 빗어낸 학생으로 변한다. 8시 40분이 넘어도 자기 자리에 않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가도 담임이 복도를 지나가는 것 같으면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6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간의 성장은 경이롭다.


대충 하루간 내가 만나는 인간들을 계산해보면 어른들(교직원) 10명, 학생들(2,5,6학년) 150명 정도 되는 것 같다. 내가 접하는 인간의 수를 세어본 까닭으로는 인간의 서열에 대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은 또래집단을 형성한다. 그리고 몇 해간 지내본 아이들 사이에는 서열이 분명히 있다. 이는 남자아이들 사이 보다 분명하게 보인다. 나는 이것이 어쩔 수 없다고 보면서도 서럽다. 인간은 참, 아름답지 않다.


 우리반 아이들을 데리고 졸업앨범을 찍으러 가는 길이었다. 우리 학교 근처에는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예쁜 공원이 하나 있다. 이 낙후된 동네에 보석처럼 빛나는 이 공원을 나는 아주 좋아한다. 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그 주위 다양한 수종의 장미가 빽빽하게 심어져있어 산책만 가도 향긋한 장미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고, 횡단보도 한타임에 갈 수 있도록 아이들을 채근하고, 시끄러우면 조용히 하라고 면박을 주며 그렇게 공원에 도착했다.


 졸업앨범에 들어갈 사진이니 아이들에게 미리 복장과 포즈를 준비하라고 일주일 전부터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 나름대로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왔다. 6학년 아이들인데도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감동했다. 이렇게 착한 6학년 아이들이 있다니. 역시 올해는 대박이구나 싶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의 매력은 순수함이다. 그 위에 잘 정돈되지도 않은 화장을 올리면 오히려 뻔해져보인다. 말간 얼굴을 한 아이들의 사진촬영을 구경하며 나도 찰칵찰칵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한마디 한다. 이야~ 좋을 때다. 맞다. 아이들의 좋을 때의 한 켠에 내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참 마음에 든다.


한낮의 해가 쨍쨍한데 사진을 다 찍고도 아이들은 팔팔했다. 얼른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더 놀고 가야한다는 아이들의 고집에 농구장에서 자유시간을 줬다. 여름의 중순 같은 더위에 모두가 지쳐갔다. 아이들을 위해 가난한 공무원의 지갑으로 골든벨을 울렸다. 몇몇을 데리고 편의점에 가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하겐다즈를 고르겠다는 녀석에게 넌 아무것도 먹지 말아라 장난을 치며 50% 할인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렸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으로 아이들이 이렇게 기뻐하니 이게 최소비용, 최대행복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이니 아이들도 군말하지 않고 교실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데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가 하나 들린다.


“지금 수업시간인데 왜 발언권을 안 얻고 말해? 손 들고 말하라고!”

뭔 소리인가 했더니 우리반 가장 기가 쎈 남자아이 청양이의 말이었다. 그 상대를 찾아보니 우리반 가장 밍숭맹숭한 녀석인 두부다. 하는 대화와 꼴을 보니 두부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괜한 말도 안되는 소리로 맥이고 있다. 청양이의 앙칼진 말에 두부는 헤헤 웃으며 순하게도 대답한다.

“그래서 손 들고 이야기 했어. 손 들었잖아요.”

손도 들어보이는 건 추가다. 동갑인데도 두부는 이런 상황에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쓴다. 조금이라도 무리에 포용되고 싶은 두부의 노력이다.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는데 너무 착해서 물러서 그런걸까. 두부의 순함이 담임으로써 약간 속상하기까지 하다. 기가 약한 남자아이라 학기 초부터 항상 걱정이었다. 두부의 교우관계를 걱정하는 두부의 어머님도 내 한 해간 걱정 중 하나다. 내가 보기엔 정말 괜찮은 녀석인데, 왜인지 주변 남자아이들의 인정을 받질 못한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얌전한 여자아이들도 두부를 상대로는 둘도 없이 날카로워진다. 두부의 말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고, 두부의 대답에는 누구도 기뻐하지 않는다. 실컷 웃으며 아이들과 떠들던 우리반 인싸 반장도 두부의 말에는 벼락같이 낯빛을 굳힌다. 이건 왕따일까, 뭘까. 뚜렷한 신체적 폭력없이, 신랄한 욕설이 담긴 언어폭력 없이, 누구도 두부와 놀고 싶지 않아한다.


 두부의 생채기 났을 마음이 안타까워 청양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이 수업시간이냐? 너는 왜 이렇게 잔인하냐?, 그저 기가 쎈 어린 남자인 청양이는 내 말에는 그저 멋쩍게 씩 웃는다.

 두부에게도 말한다. 손 들지마.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고. 정말 미안한 상황에서만 미안하다고 하는거야. 동갑인데 존댓말은 왜 쓰니? 두부도 멋쩍게 씩 웃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저 다정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사실 이렇게 평가하듯 말하는 나도 그렇게 좋은 인간이 못된다. 인간은 왜이리 다채롭게 입체적이고 복잡하고 착하고 나쁠까. 도덕시간에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며 살았지만 그저 행복으로 웃으신 이태석 신부님을 보니 눈물이 났다. 이태석 신부님의 경건한 삶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선하지도 않은 인간인 내가 몇 마디 말을 얹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은 아무나 살 수 없어. 신부님께서는 남들을 돕는 일이 그저 행복이었기에 이런 삶을 사신거야. 선생님도 이런 삶은 살 수 없어.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무엇일까? 그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거야. 그리고 능력이 된다면, 내 능력 안에서 남을 조금 돕는 것. 그리고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내 능력 안에서 남에게 조금이라고 선한 사람이 되길 바래.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절대 안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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