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년 전,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할 때였다. 건축가의 작품을 조사하고, 작은 모형을 만드는 수업이 있었다. 나는 모두가 선택하는 유명한 건축가 대신, 낯설지만 끌리는 이름을 찾았다. 반골기질 때문이었을까. 특이해보이고 싶었던걸까. 이타미 준이라는 한국인같지도 일본인같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의 자료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도면도 없었고, 참고할 만한 서적도 드물었다. 유명하지 않은 건축가를 선택한 업보일까. 머리를 쥐어 싸매던 와중 교수님은 나에게 딱 한마디를 했다. "그럼 직접 보고 와."
그 길로 나는 당일 왕복 제주도 비행기 표를 끊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더니, 어플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라 제주도의 대중교통은 낯설고 불편했다. 버스에 카메라를 두고 내렸고, 결국엔 택시를 탔고, 생애 첫 우박을 맞으며 거닐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공간과 마주했다. 고생을 많이하고 와서 그럴까, 건축이 좋았던 걸까, 마음 속에는 꽉 찬 감동이 있었다. 분명한 건 그것은 건물이 아니라 자연을 전시해둔 것 같았다. 그날, 건축은 예술에 속한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다.
2.
그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건축가 이타미 준. 본명 유동룡. 한국계 일본인. 두 개의 이름, 두 개의 정체성. 그는 언제나 경계에 서 있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인 부모를 두었기에 차별받았고, 한국에서는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었다. 완벽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는 건축을 했다. 경계를 긋기보다는 경계를 허물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함이 오히려 그의 고유한 건축을 만들었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김홍주 회장은 제주도의 자연을 품은 건축을 원했다. 콘크리트 건축이 당연하던 시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고민하던 이타미 준을 만났다. 그는 모든 것을 맡겼다. 2억 엔(약 20억 원)을 건넸다.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3.
하나는 물로, 하나는 바람으로, 하나는 돌로 세 개의 미술관을 지었다. 물, 바람, 돌. 이름만으로도 건물의 기능이 아니라 자연과 감각을 암시한다. 물의 미술관은 수면 위로 하늘을 담고, 바람의 미술관은 벽 틈새를 따라 흐르는 바람의 노래를 품는다. 돌의 미술관은 묵묵하다. 제주에서 수천 년을 견뎌온 돌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그는 자연 속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대로 건축을 만들었다.
제주는 그에게 단순한 작업지가 아니었다. 내면의 귀향지였다. 그는 이곳에서 점점 말을 줄였다. 더 많이 바라보고, 더 오래 머물렀다. 그가 말한 ‘침묵의 건축’은 말 대신 감각으로 소통하는 세계였다. 수풍석 미술관은 그가 하지 않은 말의 기록이다.
4.
나는 이따금 생각한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라, 자연 앞에서 겸손해진 공간일지도 모른다. 수풍석 미술관은 그러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 미술관을 지은 이타미 준은, 스스로를 건축가라기보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조용한 통역사로 여겼던 사람일 것이다.
"현대 건축에 본질적인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체온과 건축의 야성미일 것이다."
— 이타미 준
장소: 제주 비오토피아 수풍석 미술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 79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자리가 없는 경우가 많으니, 꼭 확인해보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공간의 재밌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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