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기행-무위사~백운동 원림
무위사를 나온 후 정류장조차 없는 무위사 주차장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표지판 하나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백운동 원림이 1.2km만 가면 나온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백운동 원림의 수식어로는 ‘다산의 체취가 살아있는’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자신을 아끼고 지켜주던 정조가 죽은 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에 18년 동안 유배를 살며 다산 정약용은 많은 흔적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로 보였습니다. 더욱이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백운동 원림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관심이 갔습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길에는 인도는 없고 2차선 차로만이 보였지만, 당장 지리산에서 아슬아슬한 2차선 차로를 위험하게 걸었던 저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보고 힘차게 길을 나섰습니다. 길은 잘 포장되어 험하지 않았고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아 생각보다는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얼마간 걷다보니 양쪽 언덕으로 막혀있던 시야가 트이며 월출산 자락을 낮고 짙게 깔린 구름이 선녀의 날개옷 자락마냥 곱게 감고 있는 모습이 제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도시의 거무튀튀한 회색과는 다른 하늘의 회색이 월출산의 녹색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모습이 사뭇 보기 좋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이런 좋은 곳에는 펜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먼 벽지까지 누가 올지에 대한 저의 궁금증에 답변이라도 하듯 펜션은 쓰이지 않은지 오래되어 보였습니다. 펜션을 넘어가자 바로 계곡이 나오더군요. 근래에 비가 와서 그런지 물소리가 아주 힘찼습니다.
계곡을 지나자 버스 정류장이 눈에 띄더군요. 버스정류장 명칭은 ‘안운’. 옆의 안운 마을의 정류장인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해남의 경우를 보면 버스정류장에 시간표가 붙어있기에 돌아가는 버스의 시간을 알 수 있는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버스정류장이 시간표는 이미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변색되어 있었고 그나마 알 수 있는 시간표의 날짜도 한참 전이더군요. 시간표가 몇 번 변화했을 것을 생각하면 아마 시간표를 볼 수 있었더라도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았을 것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정류장 주변으로 수풀이 우거져 시야가 막혀 있다가 갑자기 시야가 뚫리고 왼쪽으론 대나무가 나타나고 오른쪽으로는 차밭이 나타났습니다. 차밭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지만, 제가 걷고 있는 길의 한 단 위에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차밭의 등장에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설렘과 동시에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쏴아아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강하게 불며 대나무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빗줄기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언덕길의 정상에 오르는 잠시 동안에 비가 전부 그쳤습니다.
그리고 언덕길의 정상에 오르자 차밭으로 내려가는 길이 펼쳐지며 환상적인 풍경이 제 눈과 마음을 모두 앗아갔습니다. 병풍같이 둘러막은 월출산 자락 그 아래로 펼쳐진 차밭과 오래된 느낌이 나는 길, 차밭과 늘 함께하는 바람개비까지. 누구나 상상해봤을 법한 아름다운 산골의 전원적인 풍경 그 자체였습니다. 길은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경사로 인해 이 길이 저 멀리 산의 바로 아래까지 닿아 있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인생 처음 홀로 떠나는 장기 배낭여행에서 만난 이 아름다운 길은 다시금 제가 배낭여행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고 그 장면만으로도 저에게 깊은 벅참을 선사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굳이 여행을 떠나 길을 찾아 걷는 이유는 이런 곳에 있는 것이겠죠.
차밭에서 향기가 나지는 않았지만, 마치 향기가 나는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가니 이제 마을로 넘어가는 길과 백운동원림으로 넘어가는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백운동원림으로 향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화장실이 나와 거의 다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몇 미터 지나지 않아 이곳이 백운동원림임을 나타내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백운동원림은 크고 울창한 나무들로 가로막혀 보이지 않았고 입구는 동백나무의 터널로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터널로 몸을 들이밀고 천천히 정원 속으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