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기행-다산초당
버스에서 내리고 잠시 두리번거리는 동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최신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다산정약용선생유적비’였습니다. 미술적으로 아름답다고는 말하기 뭐하지만 여기가 다산 초당으로 가는 길임을 확실히 알려주는 든든함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1차선의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걸어가자 한 마을회관과 정자가 보였습니다. 스윽 지나쳐 오르막길을 오르니 오른쪽에 논 너머로 한 박물관이 보였습니다. 다산박물관이라고 표지판에 적혀있었습니다. 다산초당 후에 버스 시간이 남으면 보기로 하고 다산초당으로 향했습니다.
다산초당이 있는 다산으로 가는 길은 계속 완만한 오르막이었습니다. 하늘을 여전히 흐렸고 언제 비가 올지 알 수 없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런 불안함이 있었지만,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초당을 만나러 간다는 설렘이 더 컸습니다. 산과 논이 어우러지는 시골 풍경에 낡고 낮은 집들이 어우러져 정겨움이 더했습니다. 정약용이 유배지를 옮겨 다산으로 가는 길에도 이런 마을이 있었을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얼마간 올라가자 두 번째 마을회관이 나타났습니다. 귤동마을의 마을회관이었습니다. 여기도 그 옆에 정자가 있었습니다. 마을회관이 다른 마을회관과는 다르게 새로 지은 한옥 느낌이 강했는데 이는 최근에 들어서 다산초당이 유명해지면서 마을의 부가 축적된 덕분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매우 예전의 귤동마을을 기억하는 유홍준 교수님은 귤동마을이 새로운 한옥을 지어 깔끔히 정리된 느낌을 주어 예전의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적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귤동마을을 이번에 처음 오는 저로서는 당시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작 지금에 와서 꽤 잘 정돈된 한옥들이 있는 당시의 이미지를 떠올려 과거 귤동마을의 사진과 비교해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예전 시골의 정겨움에 큰 차이가 있더군요. 지금 와서 과거로 되돌리라는 이야기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가혹한 얘기이기에 차마 할 수 없지만, 과거로 돌아가 한 번쯤 그 그윽하고도 별난 정겨운 분위기를 귤동마을에서 느껴보고 싶어졌습니다.
귤동마을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잘생긴 한옥들이 즐비했고 대부분이 숙박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최근에 정비한 잘생긴 우물이 집안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 물을 길어 어디에 사용할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우물을 본 이후로는 경사가 더욱 가팔라서 숨을 헐떡였습니다. 얼마쯤 올라가니 오른쪽 주차장에 몇몇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이고 그 옆으로 다산초당으로 나아가는 길이 보였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정다산 유적임을 설명하는 팻말이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 가파른 계단이 보였습니다.
계단이라 말했으니 잘 정돈된 계단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널빤지 같은 돌이 계단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후에는 나무뿌리들이 층층이 쌓인 자연계단을 타고 올라야했습니다. 비가 온지 얼마 되지 않은 후라 틈틈이 있는 흙도 젖어 미끄러웠고 나무뿌리들도 수분을 잔뜩 머금어 미끄러웠습니다. 조심조심 오르지만, 경사가 더욱 가팔라져 손을 발처럼 써서 네 발로 올라가는 모양새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18년의 유배생활 중 가장 오랜 기간을 머물렀던 다산초당의 올라가는 길은 이만큼 험했습니다. 정약용의 험난한 유배생활이 간접적으로나마 와 닿는 순간이었지만, 그의 유배생활 중 이곳에서의 생활이 가장 편안했단 것을 생각해보면 참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올라가다 보면 나무로 전부 가려져 음습한 분위기를 주로 풍기는 길에 갑자기 해가 드는 곳이 나타납니다. 다산의 제자 윤종진의 묘입니다. 다산은 이 다산초당에서 제자를 키우고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유명한 책들을 저술하였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 대부분의 저술은 이 다산초당에서 거주할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학술활동 중 키워진 제자 중 하나였던 것이죠. 그의 묘가 여기 있는 데는 다산의 수많은 제자 중 하나여서가 아니라 다산초당의 땅을 제공하고 다산을 여기 머무르게 한 그의 외가인 해남윤씨 일가의 한 명이어서이기도 합니다. 해남윤씨는 전의 글에서도 말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가 속한 해남 인문의 중심 가문입니다. 그러한 인문의 전통이 다산에 이어지고 그와 교류를 한 초의선사 등의 다른 남도의 인문학자들과도 맺어지는 것을 생각해보니 해남과 강진 문화의 전통을 들여다 본 것 같은 쾌감이 느껴졌습니다.
묘의 양 옆으로 세워져 있는 귀엽지만 다부진 동자석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다시 다산초당을 향해 올랐습니다. 중간의 길에는 작은 폭포의 물줄기와 돌들이 섞인 곳이 있어 참으로 풍류를 느낄만한 곳이라는 생각과 함께 물에 젖은 돌들이 참 미끄러워 가는 길이 참 고생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길을 지나자 이제 잘 닦인 돌계단들과 함께 곧게 뻗은 나무들이 인상적인 길이 나왔고 그 위쪽을 쳐다보자 이제 건물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마주치는 서암을 지나쳐 바로 옆의 다산초당을 보는데 매우 어두웠습니다. 해를 구름이 가려서가 아니라 이미 온갖 나무들이 초당으로 들어오는 빛을 가리고 있더군요. 정조의 지원을 받으며 개혁을 이끌었던 과거와 대비되는 유배생활의 분위기가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남인이었습니다. 흔히 조선 후기를 이끌었던 서인 노론의 대척점에 있던 사람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 영조, 정조로 이어지는 강력한 왕권의 시대에 잠시나마 탕평책의 실시로 등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정조가 죽은 후에 내쳐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그는 인문과 과학, 예술을 모두 익힌 흔히 말하는 현재의 융합형 인재였습니다. 그의 저서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가 만든 거중기와 같은 기구들은 10년이 걸릴 것이라 예상하던 수원 화성의 축조 시간을 2년 6개월로 줄였으며 그가 그린 문인화나 서예, 지은 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뛰어난 이가 강진에 내려와 유배객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피하고 부정적인 태도로 대했으니 그의 암울함은 추측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암울함을 이겨내고 그가 다산초당에서 남긴 저서들이 현재까지 읽히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체감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그런 다산의 대단함을 생각해보면 다산초당의 현 모습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으실 수 있지만, 유배지의 음습한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기와집으로 된 다산초당이 매우 어색하실 겁니다. 다산초당은 원래 더 작은 크기로 된 초가집이었다고 하니 상상해보면 그 쓸쓸함이 더해질 겁니다. 현 다산초당이 아닌 원래 다산초당을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다산이 잉어를 키웠다는 연못과 다산이 쓴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 ‘丁石’이라는 글씨이지요. 정석이라는 글씨에서는 정갈함과 깨끗함이 가득 배어있어 그의 고결한 인품을 알 수 있습니다. 잉어를 키우며 매우 사랑했다는 그의 사례는 그의 고결한 인품과는 약간 다른 인간적인 면모 또한 볼 수 있지요.
길을 약간 틀어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이제 동암을 갈 수 있습니다. 동암은 유배객 시절 다산이 집필을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의 저서들을 생각하며 잠시 쉬어가는 데 문득 현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茶山東庵’이라 적혀 있는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했다고 하더군요. 약간은 휘날려 쓴듯하지만,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음이 뚜렷이 드러나고 깔끔함이 눈에 띄었습니다. 문득 이 외에도 ‘寶丁山房’이라 쓴 추사의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과연 희대의 명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순하면서고 세련되면 골격 있는 글씨가 저의 맘을 그대로 사로잡았습니다.
해남에서도 수많은 추사이야기가 나왔지만, 다산과 추사 사이에서도 꽤 교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추사는 다산의 한 세대 아래로 약간 스승님 같이 모셨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좋은 교류를 말하는 이야기로 추사의 수선화 선물을 꼽습니다. 추사가 청나라에서 받아온 수선화를 다산에게 선물하자 그에 감사하는 의미로 다산이 <수선화>라는 시를 썼다는 이야기지요. 남도 문인들끼리의 좋은 교류를 알 수 있는 일화라 생각합니다.
이제 동암을 넘어서 몇 발자국 나아가면 천일각이라는 정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다산의 시대에는 없었던 것으로 현대에 세웠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흔히 구강포라고 하는 강진의 모습이 모두 눈에 들어오며 강진만과 그 앞의 논 그리고 그 뒤의 산까지 모두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합니다. 분명 아름다운 풍경이나 이미 시름이 가득했던 유배객은 이 풍경을 보며 구슬픈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마음대로 볼 수 없는 가족들과 자신보다 먼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 그리고 이미 죽은 정조까지 생각하며 지나간 세월을 기억하고 한탄하기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늘이 잿빛인데도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매순간 보며 그거 느꼈을 감정의 결을 감히 추측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강진의 아름다움과 다산의 씁쓸함을 가득 안고 저는 천천히 다산초당을 나와 조심조심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