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기행-김영랑 생가~사의재
숙소에 짐을 풀고 나온 저의 다음 목적지는 강진읍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김영랑 시인의 생가였습니다. 강진군을 대표하는 군화는 모란입니다. 또한, 군내의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모란을 찾을 수 있지요. 또한, 강진의 중심을 든든하게 지지하고 있는 뒷산에 세계모란공원을 조성한 것도 이들이 모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강진의 사람들이 모란을 좋아하는 이유는 꽃으로 좋아한다기보다는 김영랑 시인을 매우 사랑했고 그의 시 중 하나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매우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서정시로 매우 이름을 날려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찬사까지 들었던 그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멀리서 생각의 입구가 보일 무렵 길의 모습이 갑자기 달라지며 ‘감성 강진의 하룻길’이라는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예쁘장한 주황벽돌과 함께 김영랑 시인의 시인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가 적혀 있었습니다. 누구나 한 번 쯤 들어봤을 법 하지만, 잠시 감상하고 가시죠.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봄의 맑은 날 어느 한 촌락에서 바라본 길과 그 보이지 않는 끝에서 이어지는 하늘의 모습이 연상되시나요. 그 모습에서 비롯된 따스하고 몽글몽글한 느낌이 마음속에서부터 조금씩 올라오는 그런 감정을 저는 이 시에서 느낍니다. 다만, 이 시는 사회적으로 바라보자면 적극적으로 독립에 관련된 시를 쓸 수 없었던 김영랑 시인이 우회적으로 독립을 바라며 썼던 시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마지막에 ‘~싶다.’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자는 지금은 위의 시에 쓰인 일들을 전혀 하지 못하고 바라고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이 마지막의 한 단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은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를 수도 없고,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볼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 즉, 이러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뒤의 해석은 너무 나간 것 같나요? 1920년대 이후 서정시를 쓴 작가들에게 사실 이것은 피해갈 수 없는 해석입니다. 그들은 일제의 탄압이 무서워 사회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그러니까 독립을 전면적으로 바라는 시를 직설적으로 쓰지 못했다는 비판은 다른 사회주의 작가들에게 받아야 했으며 자신들도 이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이 여인의 사랑과 독립을 바라는 마음의 두 가지 주제로 해석되는 것도 이에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두 시인이 독립을 바라는 마음을 위의 시들에 진짜로 넣었을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려운 시대에 고민을 했던 수많은 사람의 고통은 느껴지더군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김영랑 생가에 도착했습니다.
김영랑 시인의 생가는 복원한 것입니다. 미적으로 크게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감명을 주는 시인이 살았던 곳이기에 문화적인 가치가 큰 곳이지요. 김영랑 시인의 생가엔 곳곳에 시비들이 서있고 모란이 있었습니다. 모란은 아마 현대에 와서 인위적으로 심은 듯한데 여름이라 모란이 피지는 않았지만, 모란이 핀 모습을 생각하니 어울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남도를 계속 지나쳐 오면서 제가 본 대부분의 꽃들 중 모란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생가 뒤편의 동백이 핀 겨울에 오면 남도의 정경을 바탕으로 시를 짓던 김영랑의 모습이 더욱 생생할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천천히 생가를 둘러보며 시비들을 읽어나가고 그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간직하는 재미가 있으니 강진에 오면 한 번쯤 방문하기를 바랍니다.
김영랑 생가를 빠져나오니 옆에 돌과 흙이 섞인 토담 옆에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분홍빛과 주황빛이 선명한 아름다운 그 꽃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였으나 몇 번 봐왔기에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흙 빛깔의 담과 회색빛의 돌길, 그리고 알록달록한 꽃들이 이루어내는 시각적 향연이 참으로 저를 만족하게 해주었습니다. 김영랑 시인도 여름에 이를 보고 참으로 좋아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꽃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동생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백일홍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인생 24년 살면서 그때 처음 백일홍의 제대로 된 모습을 알게 되었으니 인생의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최소 아름다운 꽃이 있으면 동생에게 물어봐서라도 기억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백일홍에서 눈을 돌리니 바로 옆에 시문학파 문학관이 있었습니다. 일단 시문학파의 이름을 처음 들어서 갸우뚱 거리며 밑의 팻말에 있는 설명을 읽어보았습니다. 영랑 김윤식(김영랑), 정지용, 용아 박용철의 3인이 1930년에 창간을 주도한 잡지 이름이 <시문학>이락 하더군요. 추구했던 방향은 프로문학이나 낭만주의가 아닌 순수문학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이것저것 읽어보는데 문학사에 대해 크게 아는 바가 없고 조사해본 바가 없어 무언가 큰 감명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다만 3인의 주도에 정인보, 이하윤같은 시인들이 더 참여하였고 문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흘러가던 때에 문학 자체에 중점을 둔 순수문학을 일으키려는 운동이라는 것에서 문학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합니다. 강진과 큰 연관성을 가지지는 않으나 김영랑 시인이 강진을 고향으로 두었기에 하나 세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저는 마지막 목표인 사의재를 향해 길을 돌렸습니다. 감성 강진의 하룻길을 따라 끝까지 걸으면 나온다기에 그 길을 쭉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는 길에 대단한 것은 없고 금릉학교 옛 터가 있었습니다. 금릉학교는 20세기 초 강진 신교육의 중심지로 강진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다가 이후 강진중앙초등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김영랑 시인이 이곳을 졸업했고 1919년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내려와 몇몇 졸업생들과 여기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었습니다. 이곳의 역사적 의의보다는 이곳의 터에서 내려다보는 강진 구강포의 전체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강진이 왜 강진만으로 불리는지 처음으로 제 눈으로 알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한적한 어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더군요. 강진의 첫인상을 제대로 보기위해서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마 이곳을 말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강진의 모습을 한눈에 담고 사의재로 향하는 길은 표지판이 친절하지 않아 어려웠습니다. 이곳저곳 헤매면서 강진의 골목골목을 지나 언덕을 거의 내려오자 한옥이 모여 있는 한 구역이 보였습니다. 복원한 사의재와 그 뒤로 숙박업을 하고 있는 한옥 건물 몇 채가 보였습니다. 찻집으로 바뀌었다고 본 사의재는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애매한 곳으로 바뀌어 있었고 사의재의 마당에는 썩 보기 좋지 않은 동상들이 세워져 있어 제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아, 현대의 사의재를 평하기 전에 사의재가 어떤 곳인지 설명해야겠군요. 사의재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최초로 머문 곳입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서러운 유배시절 초기 한 주막의 주인이 그를 받아주었는데 이에 감동하여 이 주막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뜻은 ‘네 가지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이 있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분명 사의재를 복원한 이유는 정약용의 유배지이기 때문일 텐데 유배지의 씁쓸한 맛은 전혀 없고 관광지 같은 느낌만을 주고 있었으니 실망을 감출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망은 했으나 이왕 온 김에 밥이나 한 끼 하려고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시켰습니다. 꼬질꼬질한 모양새에 혼자 술을 시키는 여행객을 내칠 만도 하였으나 주인장께서는 바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매우 맛있었습니다. 혼자 술을 먹으며 ‘과연 다산도 유배 시절에 이곳에서 술을 먹었을까?’ 고민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얹혀사는 유배객이 술을 입에 대기 쉬웠을 것이라고는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많은 길을 걸어 위가 줄었는지 다 먹지는 못하고 남겼습니다. 버려지는 것이 매우 아까웠는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남은 막걸리를 주인장께서 버리는데 길고양이가 달려와 핥으려는 모습을 보고 네 거 아니라며 내쫓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산은 아마 이런 일상적인 주막의 모습에서 유배의 시름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의재를 빠져 나왔습니다.
숙소로 가는 길에 군내를 지나오면서 강진군청을 지나게 되었는데 강진을 지나간 수많은 현감들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이 고장의 세월과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구나.’하며 찬찬히 때 탄 비석들을 살펴보다가 나오는데 5.18민주화운동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군청 앞에서도 시위가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외의 지역은 알지도 못했던 5.18민주화운동이 이 남도에서는 공유되는 상처라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습니다. 오는 길에 강진읍교회를 지나쳤는데 1913년에 지어진 이 교회는 1919년 강진장터에서 있었던 3.1운동을 이끈 곳이며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서는 시위대들의 본부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습니다. 물끄러미 교회 건물을 바라보다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잠시 기도를 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현대사의 거대한 사건들은 서울에서 머나먼 강진 땅도 피해갈 수 없었음에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혀를 내둘렀습니다.
강진읍교회를 거쳐 숙소로 돌아와서 바로 씻고 지친 몸을 뉘인 채로 내일 일정을 고민했습니다. 장흥 보림사를 가는 버스가 하루에 4대. 여태껏 간 관광지 중 가장 적은 버스 대수였기에 솔직히 좀 불안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첫차 시간에만 맞출 생각을 했습니다. 강진에서의 길고 피곤한 하루를 끝마친 저는 또다시 쉽게 잠에 빠져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