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마지막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사찰기행-광주

by baekja

상무관을 나오는데 직원분이 말을 거셨습니다. 오늘 비가 많이 와서 원래 9시까지 여는 것을 7시까지밖에 안 여는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비가 많이 온 수준의 느낌이었지 재해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당장 피곤하니 빨리 숙소에 가서 쉬고 내일 구례 화엄사를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지요. 바로 문화전당역으로 가서 지하철에 오르는데 간만에 대도시에 왔는데 맛집 하나는 가야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퍼뜩 들어 핸드폰을 보니 양동시장이라는 곳에 치킨 맛집이 있다고 초록창에 바로 검색이 되기에 양동시장 역에서 내렸습니다.


내리자마자 양동시장을 살펴보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거의 모든 점포가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하늘도 잿빛이라 어두운데 불을 켜 둔 점포가 없어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장을 가로지르는데 새장에 갇힌 닭들이 보였습니다. 치킨집이 오래 전부터 근처 닭집에서 닭고기를 사오면 튀겨서 주면서 유명해졌다고 하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으스스한데 닭만 울어서 더 심적으로 움츠러들었습니다. 막상 도착한 치킨집은 오픈 시간임에도 닫혀 있어 그저 아쉬움을 삼키며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유를 한참 고민하며 걸어가는데 옆의 지하주차장에서 거대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뭔 소리인가 하고 봤더니 지하주차장이 아예 물로 차서 거대한 수조가 되었더군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치킨집이 열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역에 도착해서 지하로 들어가기 전에 반대편을 보니 경찰관들이 광주천이 범람하지는 않는지 걱정하며 순찰을 돌고 있더군요. 상황을 그쯤 맞닥뜨리자 아무리 둔한 저라도 빨리 숙소에 들어가야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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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10분을 타고가 운천역에 도착하여 쏟아지는 비를 어김없이 맞아가며 15분 정도를 걸어가니 숙소가 나왔습니다. 뭔가 이상한 네온사인이 가득하여 당황했으나 들어간 숙소는 여태껏 묵었던 어느 숙소보다 깨끗하고 정돈된 느낌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카드키를 쓰는 숙소이기도 했으니 말 다했습니다. 가격도 제일 싸니 이것이 대도시의 맛인가 싶었습니다. 바로 옆에 롯데마트가 있어 진짜 대도시의 맛을 즐기러 나와 문을 잠그는데 자동으로 잠가지는 데도 습관적으로 카드를 대 잠그려는 저를 보며 열쇠로 잠그는 문에 적응했다 싶었습니다. 카드를 대든 안 대든 문은 자동으로 잠겼는데 잠그려고 댄 카드가 뭔가 이상했습니다. 나라사랑카드더군요. 설마하고 주머니를 뒤지는 데 카드키가 없었습니다. 네, 저는 카드키를 안에 두고 밖에 나와 문을 잠가버린 것이지요. 어이없는 실수에 웃으며 잠시 서있다 프런트로 향하니 프런트에서는 마트를 갔다 오면 예비키를 줄 테니 쓰고 반납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롯데마트로 가 간만에 떡볶이와 닭강정, 초밥이라는 대도시의 맛들을 사 가지고 다시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예비키로 문을 열고 다시 반납한 후 저녁을 즐기며 휴식을 즐기고 다음날 가야 할 구례 화엄사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잠자리에 드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천둥과 번개가 매우 많이 쳐서 한 세 번을 잠자리에서 깼습니다. 8시가 넘어서 기상하고 보니 재난안전문자가 수도 없이 와 있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 관련 문자가 아닌 진짜 재난안전문자를 받아본 게 얼마만인지. 대충 보니 광주가 물난리가 났더군요. 아침을 먹고 짐을 싸서 나가는 데 여전히 비가 많이 오고 있었습니다. 운천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농성역으로 가서 터미널을 가는 그 짧은 거리 동안 제 신발과 양말은 다시 다 젖었습니다. 이런 거 이제 하루이틀도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가는데 터미널 뉴스 전광판에서 광주와 전남지역의 수해 상황을 실시간 보도하고 있더군요. 순간 광주터미널에 아무 생각 없이 있던 저는 당황했고 빨리 광주를 빠져나가야지 싶었습니다.


그렇게 표를 사고 기다리는데 제 시간에 와야 될 버스가 오지를 않더군요. 이번엔 진짜 크게 당황해서 버스기사 분들에게 물어보니 구례로 가는 길이 산사태로 막혀 운행이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 가고 싶으면 순천까지 가서 돌아가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광주에서 순천까지 두 시간 반, 순천에서 구례까지 두 시간 반. 오늘 내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올라가려했던 저는 아무래도 구례는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구례 가는 표를 취소하고 집으로 가는 표를 구매해 대기한 후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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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 못간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전날과 그 날의 비로 구례에 전례 없는 수해가 났음을 생각해보면 순천으로 돌아서 안 간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계획한 것을 모두 이루지는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쉬움이 남았기에 다음에 또 갈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논산, 남원, 해남, 강진, 장흥, 광주를 거친 제 여름여행은 조금은 허무하게 끝을 맺었지만, 정말 행복한 여행을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로만 보던 사찰을 눈으로 직접 보며 느끼고 모르는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어 간 그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을 알차고 재밌게 담고 싶었지만, 제 필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여행기는 이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사찰기행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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