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일한다고 제가 꿈꿔왔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2주차 인턴 신입에게 주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눈치나 슬슬 보다가 주어지는 일을 할 뿐이죠. 2주차에 가장 많이 했던 일은 전시실 캡션 및 도록 오타 찾기였습니다. 오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찾아서 인턴 6개월 내내 오타 찾기는 줄곧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몇몇 오타 찾기가 끝나면 길고 긴 대기 및 논문 보기 시간이 이어집니다. 사실 그때쯤 되면 논문에서 뭔 소리하는지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멍 때리는 시간이 느는 거죠.
이런 제게 자유롭게 주어지는 시간은 점심시간 하나였습니다. 점심시간은 1시간 반이었습니다. 오, 1시간 반이라니 대박. 문제는 박물관 사무동이 좁은 지라 어디 가서 쉴 데도 없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늘 근처에서 주인 잃은 강아지마냥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학예사님이 제 6개월의 점심시간을 책임질 한 마디를 건네주셨습니다.
“월정사까지 산책해보는 건 어때요? 40분이면 될 텐데?”
원래도 밥을 빨리 먹어 시간이 많이 남는 저는 눈치를 보다 한 번 해보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점심시간, 밥을 재빨리 먹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박물관 길 건너편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월정사까지는 왕복 4km가 조금 안되었습니다. 빠르게 걸어 40분 정도가 걸리더군요. 그리고 매주 2, 3회 산책하는 것이 제 루틴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산책이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상상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게 월정사까지 이어지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 산책은 거의 운동에 가까웠습니다. 그나마도 매일매일 바뀌는 자연의 풍경들을 감상하느라 제 생각이 들어올 자리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변화하는 자연은 이제껏 도시에서 만나보지 못한 생동감 있는 시간의 흐름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의 사계가 이토록 아름다움을, 흙길을 밞고 내딛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임을 길고 긴 산책길 위에서 배웠습니다.
박물관에서 월정사 일주문까지는 대략 십 분 정도 걸립니다. 아직 채 겨울이 가시지 않은 4월 초, 조금 급한 경사를 내려와 옆으로 빠졌습니다. 눈이 녹은 물이 내려와 천에는 물이 제법 있었습니다. 조심히 손을 내밀어 물과 맞닿았습니다. 물의 간질간질한 흐름이 멈춘 손에 닿는 순간 적당한 차가움이 손끝으로부터 밀려올라왔습니다. 밑바닥이 다 보이는 깨끗한 물, 시원하고 차가운 공기, 그 모든 것을 만끽하며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좁은 산책길의 끝에는 월정사의 일주문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월정사 전나무 숲길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4월 중순까지는 심심찮게 눈을 볼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녹음이 물들기 시작하고 봄꽃이 피어 5월 초면 집니다. 일주문의 가장 좋은 때는 여름이었습니다. 땀이 나는 여름 바람을 찾아 일주문의 기둥에 기대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줍니다. 바람을 쐬며 일주문의 기와 밑에서 티 없이 맑은 하늘을 온종일 쳐다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하늘이 이토록 아름다웠음을 깨닫습니다. 공해도 없고, 하늘과 가까워 눈이 시릴 정도의 파랑과 세상 만물을 품어줄 듯 포근한 하양이 뒤섞인 지구의 천장이 기와를 테두리로 그림처럼 펼쳐질 때면 그리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일주문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오른쪽에 삭발기념탑이 있습니다. 아, 삭발을 기념하는 탑이라니. 정말 삿된 욕심을 버려야만 삭발을 기념할 수 있겠죠. 산책을 할 때마다 늘 그 기념탑 앞에서 불교의 숭고한 뜻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없는 저는 잘려나간 머리털만큼 제 머리털이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전나무가 빼곡히 서있는 흙길을 지납니다. 몇몇 분들은 맨발로 걸으시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정작 저는 단 한 번도 맨발로 걸은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이 점심시간에 온 것이니 당연한 것이겠죠. 보드라우면서도 탄탄한 대지의 감각을 그 어떤 방해하는 물질 없이 맞이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걸을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넘겼던 그 생각이 지금에 와서야 아쉬움을 남깁니다.
걸음을 재촉하면 가끔은 향냄새가 코를 감쌉니다. 절의 향냄새를 싫어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좋아합니다. 마음의 안정을 준다느니 피로를 푼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딱히 믿지는 않습니다. 그냥 자연에서 쉬이 맡을 수 없는 냄새면서도 자연의 풀내음을 해치지 않는 그 부드러움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 냄새는 성황각에서 흘러나옵니다. 종종 그 냄새에 이끌려 성황각 안으로 들어가 신께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여기 잠시 머무르지만, 머무르는 동안 잘 봐달라고. 걸어가는 동안 기억에 남은 은은한 향이 저를 따라옵니다. 저의 기도에 대한 신의 대답이 향으로 들립니다.
이쯤 되면 종종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다람쥐를 보려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원래 다람쥐는 사람 앞에 잘 나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타나면 도망가기 마련이죠. 도시에는 거의 살지 않고 산에 많이 살다보니 보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미 해발 600m가 넘는 산에서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고 살아온 전나무 숲길의 다람쥐는 다릅니다. 먹이만 주면 쪼르르 따라와 가만히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평생 찍어본 적 없던 다람쥐 사진을 이 6개월 동안에 다 찍었습니다. 네, 봐도봐도 귀엽더라고요. 제 산책에서 마주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제 긴 산책길을 따라 걷습니다. 겨울에는 눈과 함께 어우러진 물의 청아함을 보고, 봄에는 천에 꽃이 비친 것에서 물의 화사함을 보며, 여름에는 물이 불어나 세차게 흐르는 것을 보며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힘을 느낍니다.
천 옆으로는 나무들이 보입니다. 늘 푸른 전나무들 옆으로 여러 나무들이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가는 4월 초에는 꽃눈이 보이고, 4월 말이면 봄꽃이 화사하게 핍니다. 그리고 5월이면 연두빛이 산을 뒤덮고, 6월이면 이제 봄의 색을 벗어나 짙은 초록색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9월 말이면 조금씩 빛깔을 띠는 단풍이 보입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걸음의 흐름 속에서 계절의 흐름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느낍니다.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고사목을 바라보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굳건한 자연의 힘을 확인합니다.
발을 씻는 곳을 지나면 이제 월정사를 마주합니다. 조그만 오르막을 오르면 천왕문이 나오고 그 천왕문을 지나면 대웅전 앞마당이 펼쳐집니다. 국보로 유명한 8각9층석탑이 우뚝 서서 저를 내려다봅니다. 문득 그 견고함에 알 수 없는 힘을 느끼며 조용히 합장을 합니다.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은 반환점을 돌아 이제 박물관으로 돌아갑니다. 박물관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더 쉽습니다. 약간의 내리막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이미 한 번 본 것들을 스쳐 지나며 오르는 동안 마주했던 장면들을 복기합니다. 처음보단 빠르지만, 선명한 장면들이 머리에 남고, 감각과 느낌으로 전환되어 오래도록 길 위의 시간을 담아둡니다.
박물관은 도시의 시간과 비슷했습니다. 그 시간과 상황은 도시에서만 살던 제게 편안함을 주기도 했지만, 종종 저를 옥죄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산책은 제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자연의 변화들을 마주하고, 제가 원하는 대로 흥미가 가는 것들을 관찰하며 보낸 그 시간은 휴식이었습니다.
종종 지금도 그 산책길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고뇌는 덜어주는 선선한 바람, 폐 구석구석을 정화시켜주는 듯한 신선한 공기, 하늘부터 땅 위의 비치는 모든 것들을 담을 것 같은 맑은 물, 매번 그 자리에서 살아 숨 쉬며 변화하는 생물들까지.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 길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