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일상-식물들

by baekja

백령도에는 수많은 식물들이 자란다. 이름 모를 식물들은 겨울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기 시작하는 6월이면 내가 원시림에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겨울에는 아무것도 없다가 내 키만큼 자라는 어떤 식물을 보았을 때는 정말 사람이 10년만 안 살아도 이곳은 폐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백령도에서 볼 수 있는 식물들 중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라 안타깝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수를 봤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시작한다.


모든 생명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봄, 밖에서는 진달래, 개나리, 매화 등의 다양한 꽃을 통해 봄의 정취를 만끽한다. 부대 안에서 가장 많이 흔하게 피어나는 꽃은 민들레다. 한국 사람이라면 그 꽃의 이름을 모를 리 없는 세상에서 가장 흔해 보이는 이 꽃은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가을에도 쉬이 피어나 봄꽃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부대 안 공터에서 수백 수천의 민들레가 피어나 샛노란 빛을 발하는 때는 사계 중 봄밖에 없다. 봄의 따사로운 햇빛을 민들레 꽃잎들이 반사시키는 순간엔 그 광채에 어지러이 몸을 똑바로 가누지 못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움도 순간이 지나고 흰 솜방망이에서 조그마한 솜털들이 하나씩 빠져나가면 기다란 초록색 기둥들 많이 그 아름다움을 기억한다.


민들레가 가장 인상적이긴 하지만 물론 민들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부 앞의 벚나무 또한 봄임을 알린다. 겨울에는 그저 그런 하나의 나무로만 보이던 그 나무는 4월이 되면 서서히 꽃을 피워 4월 중순에서 말쯤 만개한다. 그리고 만개하는 그 순간만큼은 가장 그 한그루만으로 모든 시선을 집중시킨다. 옅은 분홍색과 흰색이 곱게 어우러진 꽃은 왜 사람들이 그리 벚꽃놀이를 좋아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끔 한다. 그리고 한껏 자신의 우아함을 뽐낸 후에 한 잎씩 산들바람에 나풀나풀 져가는 벚꽃 잎은 봄의 눈과 같은 아름다움과 동시에 일순간의 화려함이 진 후의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봄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다보면 어느새 무더운 신록의 계절, 여름으로 들어온 것을 느끼게 된다.


6월의 시작은 역시 장미다.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는 안타깝게도 부대에서 썩 많이 보이지 않는다. 듬성듬성 보이는 수준인데 그마저도 다른 수풀에 묻혀 크게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게 가끔 보이던 장미들이 지면 이제 무궁화가 피기 시작한다. 부대 곳곳에 심어져있는 무궁화는 생각보다 많아 아주 인상적이었다. 무궁화는 한국의 국화라는 명칭에 걸맞게 한국미가 잘 드러난 느낌이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그 미감은 눈에 띄지 않는 듯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정도의 딱 알맞은 아름다움만을 드러낸다. 다섯 장의 분홍 꽃 가운데서 바로 세워진 노란색의 수술과 암술대는 아름다움 속 안에 숨어 있는 우리나라의 곧은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의 미감을 무궁화에 대입하여 쳐다보다가 슬슬 순찰을 돌게 되면 울타리를 구불구불 타고 오르던 덩굴의 정체를 알게 된다.


부대 전체에 가득한 덩굴식물인 나팔꽃은 그 수가 많음과 맞게 그 색깔도 다양하다. 흔히 아는 보라색부터 짙은 파란색, 하늘을 닮은 연한 파란색 등 그 아름다움을 가지각색으로 뽐낸다. 이런 다양한 색감은 집단적인 노란색을 모아 색감의 강렬함을 과시하는 민들레와는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다. 민들레에서 얻는 미적 충격은 피아노를 여러 대 모아놓고 음악을 들려주어 얻는 것과 비슷하다면 나팔꽃은 여러 악기가 모여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한 종류의 꽃에서도 각각의 특색이 느껴지는 느낌이랄까. 한 꽃에서도 진한 색은 띠지 않아 마치 연한 그라데이션을 띠고 있는 것 같은 나팔꽃의 잎은 그 다양함 덕분에 그 꽃에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든다. 그러다 나팔꽃마저 지는 서늘한 가을이 오면 또 다른 새로운 꽃이 나타난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피는 분홍빛과 빨간빛이 잘 어울리는 꽃. 모두가 아는 코스모스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을은 단풍이 내린 나무 아래서 하나 둘씩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줄기에 기대어 쉬는 모습이거나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들판에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것을 바라보는 모습일 것이다. 부대에는 없지만 저번 부대 행사로 행해진 트레킹 때 백령도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다수 볼 수 있어서 가을이 바짝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때 본 코스모스는 제각기의 색을 고요히 발하며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렇게 코스모스를 통해 가을이 온 것을 알면 온 산이 단풍으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단풍에 어울리는 나무하면 역시 단풍나무를 빼놓을 수 없지만 그 다음으로 치는 것이 은행나무의 단풍일 것이다. 민들레의 생동감이 넘치는 샛노란 빛과는 다른 왠지 모를 처연함을 내뿜는 은행잎의 노란색은 이제 가을이 끝나 감을 느끼게 한다. 민들레가 생명이 태동하는 시작의 노란색을 상징한다면 이제 다 져가는 마지막 아름다움을 발하며 한 잎 한 잎 져가는 은행잎의 노란색은 일 년의 마지막이 다가왔다는 마무리를 상징한다. 그렇게 단풍이 생명이 보여주는 마지막 아름다움이라고 느끼면 여지없이 칼 같은 겨울바람이 우리를 덮친다. 하지만 이 추위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하는 식물들이 있다.


고전시가에서도 많이 쓰이는 소나무가 겨울이 되면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곳곳의 신록에 묻혀 자신의 가치를 크게 드러내지 못하던 소나무는 겨울에는 혼자 그 날카로운 잎 속에 담겨진 초록빛을 은은하게 드러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사계절 내내 그렇게 빛을 드러내온 일관성과 겨울이라는 엄청난 시련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 조상들과 현재의 우리도 소나무의 기개와 지조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또한 눈이 덮여 잎의 초록빛이 가려지게 된다 하더라도 줄기의 결과 아름답게 굽은 형태를 오히려 드러내며 설경을 더욱 빛내어 우리에게 또 다른 호강을 시켜준다. 이렇게 지조를 드러내는 소나무 말고 굳이 겨울에 꽃을 피워 자신의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꽃이 있다.


섬에 자주 서식한다는 이 식물은 사계절 푸른 잎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새빨간 꽃잎 안에 노란 수술과 암술이 가득 찬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여수 오동도에서 그 아름다움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는 동백이다. 눈이 덮인 겨울의 흰 색 캔버스 안에서 아름다운 붉은 점이 보인다면 바로 동백일 것이다. 겨울에 핀다는 것만으로도 희소성이 강한 이 동백꽃은 어찌 보면 장미보다도 강렬한 빨간색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주장한다. 장미가 왠지 모를 서양의 ‘red’를 상징하는 느낌이라면 동백은 한국의 ‘붉음’, 혹은 동양의 ‘紅’을 상징하는 것 같아 훨씬 정감이 간다. 눈의 흰색이거나 흙의 속살 색인 갈색을 붉게 물들이며 겨울의 한 자락을 장식하고 나면 사계절이 계속 돎에 따라 동백은 이제 봄꽃들에게 차례를 넘겨주게 된다. 그 때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동백꽃잎을 보면 사락사락 떨어지는 그 모습마저 한국화의 우아함과 한국 자기의 곡선미를 닮은 듯해 그저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할 뿐이다.


물론 이렇게 각각의 계절을 지키며 상징하는 식물들도 있지만 내가 모르는 수많은 꽃들도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지나갔을 것이다. 이름 모르는 꽃들이 많아 여기에 적을 수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꽃과 같이 눈에 띄는 식물들 말고도 곳곳에 숨어 있는 고사리, 균으로 치부하는 20cm 넘는 신기한 버섯 등 사실 다양하게 있다. 그 각각의 존재로 인해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 또한 이를 통해 내가 살아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백령도라는 부대를 택해서 이런 많은 식물들을 접할 수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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