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비, 하필 거기서 만났네

빗속 예류에서

by 피카타임

난 비가 싫다. 비가 도대체 왜 오는 지를 모르겠다. 물론 안다. 수증기가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는 과학적 현상을.
하루 비가 오면 절감되는 모든 경제적 비용에 대한 이익을.
그리고 우리가 발붙이고, 기대어 사는 이 땅의 에너지원으로서 역할을.
난 비가 평생 싫었다. 단 한순간도 비를 기다리거나, 그 속에서 좋아했던 기억이 없다.

내가 비를 싫어하는 건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불편해서 싫다.
우산을 들어야 하는 번거로움, 거리에 높낮이가 다른 우산이 스칠 때마다 조심스럽고, 아무리 기를 쓰고 다녀도 결국 어딘가는 젖고야 마는 불쾌함.
공기가 습하니 잘 마를 리 없는 그 날씨 속에서 젖은 옷을 입고 퇴근할 때까지 꼼짝없이 근무를 해야 하는 그날은 고역, 그 자체다.
어릴 때도 더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얼른 들어가 뽀송 거리는 파자마로 갈아입고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싶은데 학교가 파할 때까지(심지어 고등학교 때는 밤 11시가 다 되어야지 그 파하는 시간을 맞을 수 있으니)
꼼짝없이 교실에 젖은 채로 잡혀 있어야 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유쾌하지가 않았다.
일상이 때론 보이지 않는 감옥 같다 했는데 비는 보이는 창살을 하늘에서 땅까지 쳐주는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비란.
역시나 좋을 리 없다. 비가 오면 모든 일정이 더뎌지고 마음은 앞서고 몸은 지치게 되고, 손에 사들 수 있는 짐이 우산 때문에 줄어들거나, 혹은 배로 무거워진다.
가장 중요한 건 제대로 된 풍경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행 책자나 인터넷에서 소개받은 기대하게 만들었던 여행지의 풍경은 모두 맑은 날이지, 비 오는 날은 하나도 없다.
여행은 일상을 떠난다는 뜻이고, 일상은 잘 벗어나기 힘들다는 뜻이므로, 여행은 자주 있기 힘든 일인데 하필 비 오는 풍경이라니...



대만은 비가 자주 오는 여행지라 들었는데 감사하게도 난 갈 때마다 날씨가 좋았다.
그날은 예류에 간다고 서둘러 호텔에서 나왔는데 심상치 않은 비가 왔다.
예류에 대해 소개받았을 때 신기하다 못해 신비한 느낌까지 들었던 곳이기에 전체 일정 중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이었다.
호텔을 나와 예류행 시 외곽 버스를 타러 가는 동안 벌써 지치고 젖었고 흥이 다 빠져버렸다. 비를 얼마나 싫어하면, 그 먼 곳까지 가서 예류를 포기하고 실내 쇼핑센터에나 있을까 하는 마음속 갈등이 계속되었다.


종종 그렇듯 난 갈등을 여전히 안고 완벽한 결정도 아닌 채 한쪽의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날씨가 맑았다면 도시 중심지를 떠나 외곽으로 멀어지는 버스 안에서 풍경을 보며 마음속 흥이 머리 꼭대기까지 뻗쳤겠지만 흥은커녕 중도에 내릴 수도 없는 길 위에서 계속되는 의구심과 다투고 있었다.
이 날씨에 예류에 가는 게 맞는 거니?


버스에 내려 여행 메이트인 동생과 나는 작은 우산을 하나씩 들고 끌려가듯 예류 매표소까지 걸어갔다.
사실 우산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리고부터 방향 없이 이쪽저쪽으로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우산을 어디로 향해 고정하든 무용지물이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는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우비를 파는 할머니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며 우비 두 개를 사라고 내민다.
우린 이왕 많이 젖은 거 괜한 호객꾼에 넘어가 헛돈을 쓰지 않겠다 다짐을 하곤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우리 안 삽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우비 건네는 손도 단호하다.
우리는 우산을 흔들어 보이며 우산이 있으니 필요 없다고 하자,
할머니가 미간을 가득 찌푸리신 채로 우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우비로 두세 번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로 한참을 이야기하신다.
보통은 장사꾼들을 그냥 거절하고 지나쳐 다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그 할머니의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와, 근심 가득한 표정이 우릴 사로잡아 한참을 바라보게 만들었고, 가만히 보던 동생이 "언니, 나 이 할머니 무슨 말 하는지 다 알아들을 것 같은데?!"
하더니 무슨 동시통역사라도 되는 듯 할머니 말을 옮긴다. "너희들 그렇게 아무것도 몰라서 우비 안 입고 갔다가는 큰일 난다, 지금 젖은 건 일도 아니야 , 우비 안 입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어서 돌아다니지도 못해, 감기 걸리고 큰일 나, 우산 가지고는 택도 없어! 안에 들어가면..."
할머니는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게 분명하다. 우린 또 한참을 까르르 거리며 어느덧 우비를 입고 있었다.


예류 지질공원은 , 특히 폭우 속 예류 지질공원은 장관이었다. 철썩 거리며 기암괴석 가까이 까지 밀려왔다 나가는 파도와, 물에 젖어 반질대는 괴석들, 자연경관을 보러 간 곳답게 그곳은 진짜 자연이 주인공이었다. 2천만 년 동안 풍화와 침식에 의해 생겨진 기암 괴석 들은 살랑거리는 쾌청한 날씨의 바람으로만 이런 모습을 만들었을 리 만무하다.
오늘같이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많은 날들이 모여서 저토록 신기한 모습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날씨 탓에 관광객이 거의 없었던 그곳에서 자연이 마구 주인이 되어서 노는 모습을 조용히 객이 되어 지켜보았다.
어차피 비 때문에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는 것도 포기했다.
그날 난 우비 속에서 거친 비를 피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맞으며 비가 처음으로 괜찮다 느껴졌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얼굴에 와서 비가 물따귀를 때릴 때마다 저절로 웃음이 쏟아졌다.
동생과 나는 별 대화 없이 그저 유쾌하게 웃었고,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비바람이 기암괴석을 조각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렇게 마지막 시간까지 그곳에 있다 왔다.
다시 입구로 나와 우비를 벗자 , 얼굴이 너무 젖어서 몸도 포기했더니 할머니 말대로 옷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젖은 몸을 예상하고 다음 일정 없이 호텔로 바로 들어가자 생각했는데 우린 그렇게 우비 덕으로 또 이곳저곳을 더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인터넷에 예류 지질 공원을 찾아보면 많은 관광객들의 후기 속 날씨는 맑다.
나는 맑은 날의 예류는 모른다.
하지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도 꼭 망설이지 말고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여행 이후로 우리 집 서랍장에 일회용 우비가 늘 구비되어 있다.
일상을 살면서 난 우비를 쓸 만한 비를 만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그날은 분명 퇴근해서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거의 지옥 같은 기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방으로 쏟아지는 비를 우비에 의지해 다시 맞아볼 수 있길 또 기대한다. 나만의 아늑한 우비에서 젖을 걱정 없이 그렇게 싫어하는 빗속을 맘껏 누벼보고 싶다.



keyword
이전 07화'유채색 고요'와 만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