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촌에서 살아보기'과정에 대한 스물 여섯번째 글
하루종일 잡초 제거 작업을 하고, 산채마을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제초제를 옥수수밭 주변에 뿌리고 있었다. 제초제가 독하기 때문에, 동료들과 되도록 떨어져서 작업을 하였다. 그때 멀리 옥수수밭 한쪽 귀퉁이에 둥글게 모여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그런데 동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가끔 큰 소리도 났다. 심각한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는, 굳이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제초제도 마저 뿌려야 했다. 작업을 마친 뒤, 산채마을로 돌아가는 동료들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나중에 들으니까, 동료들 중에 몇 명이 불만을 터트렸단다. 공동으로 진행하는 곰취와 곤드레 채취 작업에 왜 일부만 참여하는지, 그리고 공동 농장의 일을 할 때 꼼꼼하게 일을 하지 않고 대충 대충 하는 지 등등… 결국 그 날의 언쟁은 공동 농장에 대한 기여도 평가 기준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 규모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농촌에서 살아보기’에 참여한 우리 10명의 교육생들은, 개인 텃밭을 가꾸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같이 가꾸는 밭이 3천평이나 되다 보니까, 굉장히 작업이 많았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작업할 때마다 1~2명씩의 동료가 빠지곤 했다. 참여한다 해도 체력이 약하거나 농사 일에 익숙하지 않은 동료들은, 밭일이 서툴 수밖에 없었다. 생산성에서 개인 차가 나다 보니까, 생산성이 높은 사람들은 불만이 생길 수도 있었다.
교육생들간에는 공동으로 작업을 하고, 수확물은 똑같이 나눈다는 원칙이 있었다. 이 원칙으로 인해서, 모두에게 비슷한 노동 투입량과 생산량을 암묵적으로 요구하였다. 이것은 교육 참가자 10명의 남녀 동료들이 모두 비슷한 체력과 기술,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원칙이었다.
우리가 교육을 받고 있던 산채마을 뒤편에는, 곰취와 곤드레 밭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교육생들이 입교하기 전에, 대표님과 팀장님이 심어놓은 것들이었다. 그곳의 곰취와 곤드레를 교육생들이 원하는 대로 수확해서 먹거나 팔아도 된다고 허락해주었다.
교육생들은 곰취와 곤드레 판매대금을 공동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갈등의 씨앗으로 작용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자 동료들을 중심으로 몇몇 교육생들이, 지인들을 대상으로 판매를 하기 시작했다. 일부 여자 동료들은 수십명의 지인들에게 판매를 하였다. 주문이 들어오면, 여자 동료들을 중심으로 공동 채취작업을 진행하였다. 지인들로부터 직접 주문을 받은 동료들은, 책임을 지고 채취해서 택배까지 보내야 했다. 공동 기금을 위해 판매를 했는데, 택배 업무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지인 판매를 주도했던 몇몇 여자동료들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떤 동료들은 판매도 거의 하지 않았고, 채취 작업에도 열심히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인 판매를 주도했던 몇몇 동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매출만큼 수익을 나눠 주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다른 동료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요구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공동작업은 곰취나 곤드레 채취와 판매작업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마토의 곁순을 거의 매일 혼자서 따주거나, 모종을 키우기 위해서 하루에 두번씩 규칙적으로 물을 주면서 건사하던 동료도 있었다. 얼마 전부터 키우기 시작한 닭들에게 모이 주는 작업을 혼자서 도맡아 하던 사람도 있었다. 이런 작업들은 바로 매출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생산과정의 일부이기에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어떤 조직에서도 모든 사람이 똑 같은 투입시간과 노력으로 일을 하기는 어렵다. 특히 농촌에서는 고령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일한 만큼 가져가자.’ 보다는 ‘모두 함께 일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노동 가능한 인구수가 절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결과의 분배보다는 과정의 적극적인 참여도가 더 중요하게 평가된다.
또한 농업이라는 산업 자체의 특성상, 공동 작업의 중요성이 더 부각된 것 같다. 바쁠 때 이웃간에 서로 도와주면, 작업이 훨씬 쉬워진다. 같은 일을 혼자 하게 되면, 진도가 더디어질 뿐 아니라 일이 고단하게 느껴진다.
조선시대에 농촌에서 두레가 활성화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농사철에 서로 협조하여 노동을 하면서, 이것이 상호부조(相好扶助)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두레에서는 노동공동체 역할을 수행하면서, 강제적인 규범을 만들기도 했다. 농사 일뿐 아니라 마을의 도로보수, 다리 축조 등도 공동 노동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두레는 농촌의 공동체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함께 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삶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던 것이다.
옥수수밭 사건 이후 우리 교육생들이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기에 무엇이 부족할까 생각해 봤다.
첫째는 두레와 같은 규범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동 노동의 참여 원칙, 생산물에 대한 분배 원칙 등등… ‘교육생 신분이니까, 모두들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도 구체적인 규범이 필요했다.
두번째는 평생 서로 다른 삶의 스토리를 살아왔던 사람들간의 만남이기에, 서로 협업하고 소통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든 과정이었다. 누구는 평생 교직에 있다가 교장선생님으로 퇴직을 했고, 다른 이는 해군 장교로 예편을 했다. 또 어떤 이는 서울시 공무원 생활을 해왔고, 대기업 직원으로 10년정도 근무한 젊은 친구도 있었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사람들의 모임이었기에, 관점의 차이가 컸다.
특히 두번째 요인은 동료들이 횡성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곤 했다. 농촌사회의 공동체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옥수수 밭에서 일어났던 동료들간의 갈등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밖으로 터져 나왔다. 공동으로 수확한 옥수수를 지인들에게 판매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가격을 싸게 책정했기 때문에, 지인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동료 A가 너무 많은 분량을 팔아 버렸다. 결국 우리들이 먹을 수 있는 옥수수마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어느 날 동료 B의 딸과 사위 가족이 산채마을에 방문하였다. 딸 가족에게 옥수수를 삶아주려고 했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지인 판매량이 너무 많아서, 옥수수가 다 떨어진 것이다. 그 일로 결국 A와 B는 싸우게 되었다.
어쩌면 수십년동안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서로 싸운 두 동료는 다시 가까운 이웃이 되기 어려울만큼 사이가 나빠졌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간의 갈등이, 농촌이라는 공동체 문화에 익숙해지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평생 농촌에서 생활한 사람과 도시에서 온 사람들간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할 것이다. 수십년동안 농사만 지으면서 삶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온 농부들, 반면에 회사라는 테두리에서 경제생활을 하면서 삶을 만들어왔던 도시인들. 너무나 큰 차이가 존재하는 삶의 여정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