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잡는 자식
창업주때에는 잘 운영되다가 2세가 실권을 잡으면 망가지는 그룹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상속 관련 주제는 아닙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사업 다각화'라는 말은 기업 경영에 있어 자주 쓰이는 말이죠.
동시에 기업금융을 좀 하는 심사역이라면 한 번쯤 본인 심사 의견서에 써봤던 표현일 겁니다.
주제와 연관된 오늘의 주인공은 사업 다각화를 섣불리 했다가 그룹 (혹은 기업) 전체가 망가져 버린 케이스.
벌써 4~5년 전쯤 된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부결했던 기업이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예전에는 '그것 봐라!'라면서 통쾌해 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돈 버는 기업 하나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다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크게 듭니다.
암튼 최근 기업회생에 들어간 리트코 심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M&A 매물 분석] 리트코, 부동산 자산만 400억 원대 - 딜사이트
모르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업무 하면서 배운 건데 지하철 타다 보면 분진을 해결해주는 '집진기'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확 와닿는 것이 아니라서 저도 환경공학을 전공한 형님에게 물어봐서 겨우 개념을 알게 되었죠.

이 기계로 말할 것 같으면 주로 지하철 환기구 주변에 설치됩니다.
그래서 지하도에서 발생하는 분진을 해결해 주는 일종의 공기정화 역할을 한다고 해요.
리트코는 이 집진기를 제조해서 지하철 공사에 납품하는 국내 기업이었습니다.
지하철 미세먼지 리트코 전기집진기가 잡는다 | 서울신문
기술력도 있고 납품처가 지하철 공사를 비롯한 코레일이니 사업 안정성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기쁜 마음으로 심사를 하러 갔는데 본사 건물이 꽤 이상하더군요.
역삼동에 위치한 사진 속 건물이 본사였는데 위층은 분양을 완료한 일종의 빌라였고 (제 기억이 맞다면) 아래 저층부만 기업 소유 근생건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면담 장소는 서늘한 지하 2층.
이상한 구조의 건물을 보면서 왠지 모를 '싸한 기운'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이 핵심 지구에 건물을 세워서 '윗부분을 분양한다'라는 건, 그만큼 돈이 없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죠.
역시나 실사를 해보면 해볼수록 '뜨악' 할만한 것들이 보였습니다.
사실 회사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좋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제 마음을 끄는 건 대금 회수가 확실한 매출처를 보유하고 있다는 거.
그런데 '왜 망가졌을까?', '왜 작은 은행한테까지 손 벌리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위에서 이야기했던 '사업다각화'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잘하던 기존사업에서 현금이 나오기 시작하자, 이들은 본인들이 잘 안다고 생각한 지하철에서 다른 사업 기회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스크린 도어 광고.
'효천'이라는 자회사를 두고 포스코에서 자금을 유치해서 신사업으로 진행을 시작하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제 지하철에서 모두들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 시대가 되었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는 그속에서도 책을 읽는 사람입니다만...에헴

기업들도 이걸 다 아는데 무리하게 돈을 내서 지하철 광고를 할 요인이 사리지게 됩니다.
그런데 코레일과 체결한 계약은 장기계약.
Macro Trend를 제대로 읽지 못한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실적이 급하강하기 시작하다보니 잘 나가는 본업에서 번 돈을 자회사가 다 까먹는 구조가 되어 버린 것.
JV 형식으로 투자에 참여했던 포스코도 결국은 적자 규모가 커지자 해당 사업에서 손절을 선언합니다.
[기업]포스코ICT 투자 리스크 안고 막대한 투자 손실… 방만 경영 논란 < 경제일반 < 경제 < 기사본문 - 영남경제
사실 이때 해당 사업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면 그나마 본진인 리트코는 살릴 수 있었을텐데...
투자금 생각하며 아쉬움에 계속해서 자금을 투입했고 결국 본점 사옥을 이용해 부동산 금융까지 일으킵니다.
신사업 하나 키워보겠다고 나섰다가 기업 자체가 회생에 들어가버린, 불운의 사례가 되어버린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몇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신사업을 시도한 것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신사업을 벌리는 건 쉽지만 철수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간과했어요.
항상 Exit Plan을 세워둬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것이 패인입니다.
두 번째로 신사업을 진행하려면 버틸 수 있는 체력, 즉 재무안정성이나 총알이라 불리는 자본력이 막강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이렇게 좋은 모기업도 무너질 수 있죠.
마지막으로 신사업이라 하더라도 최소 이익은 확보하거나, 최소한 적자는 나지 않아야 하는 사업이어야 합니다.
요즘은 잠잠하지만 과거 미래 가치만 이야기 하면서 계속 적자만 내는 기업들이 스타트업이라는 가면을 쓰고 주변에 나타났습니다.
개인적으로 계속된 적자 기업이면서 '유망한'섹터에 있는 기업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위험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이제 회생에 들어갔으니 새로운 기업이 누가 될지 궁금해지네요.
기술력은 있으니 과거의 영광을 어서 찾기를 바라며...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P.S: 이후 이야기.
관련 심사건은 당연히 부결했습니다.
비록 당시 지점장이 부행장과 형님-동생 하는 사이였지만, 자회사 어려움을 이유로 부결 페이퍼를 신랄하게 써서 제출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제 인사권자에게 찍혔고 승진에서 밀렸습니다.
아시다시피 리트코는 3년 후 기업회생에 들어갔습니다. 담당하던 지점장과 부행장은 모두 연임없이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직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거보면 아직 세상은 공정한 것 같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