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단단 Nov 30. 2023

줌 수업에서 누군가의 방을 들여다볼 권리



2020년의 교실은 단연코 '줌(ZOOM)'으로 연결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옆 나라에서 시작된 실체 모를 전염병 학교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지 두 달쯤 지났을까. 끝나지 않는 겨울방학을 즐기고 있던 이 나라의 학령기 아이들을 전 국민이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만 아니라 수업의 질이나 플랫폼에 대해 참견하는 언론과 학부모들의 질타에 교사들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실시간 화상수업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데'를 운운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 우리의 얼굴이 팔리든, 학부모가 옆에 앉아 수업을 지켜보든 이제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선생님은 교실에서, 아이들은 집에서.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줌으로 연결된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면대면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사회로 환경이 180도 바뀌는 것에 비해 준비는 생각보다 순탄했다.

먼저 교사 계정으로 '줌 주소'를 생성해 학급 밴드 공지사항에 고정했다. 이제는 8시 50분까지 학교 정문이 아닌 줌 주소를 접속한 후 자리에 앉아 있어야 출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새 학기에 학급 규칙을 세우듯 줌 규칙을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카메라였다. 수업 중 타당한 이유 없이 화면을 끄거나, 자신의 얼굴이 아닌 애꿎은 교과서나 벽을 비추는 등의 편법을 사용하면 그 수업을 결석한 것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교실에 앉아있으면서 딴짓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참 어불성설인 규칙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또 아이들끼리의 메신저는 주고받을 수 없도록 차단했고 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캡처하거나 사진 찍는 것은 초상권 침해라고 엄포를 놨다.


렇게 한참을 규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중, 일대일 비밀 채팅이 왔다.

우리 반 지환이었다.



"선생님, 근데 제가 태블릿이 없는데 혹시 학교에서 빌릴 수 있나요?"



아차, 가장 중요한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집에 컴퓨터나 노트북, 태블릿같이 인터넷 연결을 할 수 있는 기기가 없으면 이알리미로 신청한 후 가져가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우리 반은 스물여섯 명의 중 열두 명의 아이들이 대여를 신청했다.



5월의 어느 월요일, 드디어 줌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이들도 처음이지만, 나도 처음이기에 연습을 많이 했다. 출석확인 까먹지 않고, 전담 수업시간 잘 맞추고, 과제 확인 잘하면 되겠지. 나는 어떤 변수가 찾아와도 태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사람처럼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시작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나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와 만나게 되었다.

실시간 화상 수업을 하겠다고 처음 결심했을 때와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로 그 현실, 우리 반 아이들의 '어려움'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초등학교 아이들은 교실에 모여 있으면 다 비슷비슷하다. 아이다운 편한 옷차림도, 책가방이나 실내화주머니도, 사춘기가 아직 오지 않아 천진난만한 얼굴도 다 비슷하다. 누가 더 잘 살고, 누가 더 어려운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요즘 점심 급식은 무상으로 제공되고, 우유 급식은 희망자만 신청한다. 반드시 필요한 기초 학용품이나 미술준비물도 어지간하면 모두 학교에서 제공하는 시대다. 그런 탓에 우리네 교실에선 특정 아이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차마 하게 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아뿔싸, 줌 수업은 너무나 확실하게 그 어려움이 보였다아이를 감싸고 있는 방의 모습과 분위기가, 아이가 앉아 있는 자세가 이 아이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교사이 어른인 나한테만 보이는 게 아니라 스물여섯 명의 아이들 눈에 여과 없이 비치고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윤수의 화면을 보니 팔꿈치로 얼굴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였다. 자세히 보니 엎드려 있는 듯 보여 나는 윤수를 꾸짖는 말투로 "김윤수, 얼른 책상에 가서 바른 자세로 앉으세요"라고 했다.


흔히 할 수 있는 말 아니었던가.

모름지기 학생이라면 앉을 수 있는 책상 하나쯤은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김윤수, 얼른 책상에 가서 바른 자세로 앉으세요"


그랬더니 윤수, 이렇게 답했다.


"선생님 저 집에 책상이 없어요"



사고회로가 잠시 정지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들도 숙연해졌다. '모든 아이들이 집에 책상이 있을 것이다'는 대전제는 내 착각이고 편견이었던 것이다. 나는 윤수가 어려운 형편이라는 것을 그 순간 직감했다. 거리낌 없이 말을 내뱉은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윤수에게는 한없이 미안했다.



"윤수야, 그렇게 있으면 허리도 아프고 자세 나빠져. 어디 기대서라도 앉으세요."


대충 얼버무렸던 나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또 이런 적이 있다.

소영이의 뒤편으로 연로하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다소 낡아 보이는 내복차림으로 자꾸 왔다 갔다 하시는 모습이 잡혔다. 그들은 당신들이 화면에 나오고 있는지 미처 모르시는 눈치였다. 나는 괜찮았지만, 실시간 생중계되는 줌 수업의 특성상 여러모로 마음이 불편하고 걱정됐다. 고민을 거듭하다 쉬는 시간에 소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영아, 선생님인데 지금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같이 있지?"


"네 선생님, 왜요?"


"자꾸 줌 화면에 소영이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이 보이는데, 아마 보이는지 모르고 계신 것 같아서"


"아아 할머니 할아버지 괜찮으실 것 같긴 한데, 좀 그러면 제가 말씀드릴게요. 근데 딱히 어디 계실 곳이 없어서..."


"응?"


"그.. 따로 어디 들어갈 계실 방이 없어요. 저희 집이 거실밖에 없어서요."




소영이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괜히 전화를 걸었다 싶어 후회했다. 나는 소영이에게 재빨리 아니라고, 괜찮다고, 할머니 할아버지 신경 쓰이시니까 절대 말하지 말라고 거듭 야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


일련의 사건들 이후 나는 우리 반 모든 아이들에게 줌 화면의 배경을 흐릿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 알려줬다. 그리고 학급 밴드 공지사항에 있던 각종 규칙들을 내리고 맨 위에 [줌 배경 흐릿하게 만드는 법]을 고정했다.




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의 색깔과, 가구들분위기를 낱낱이 공개해야 하는 줌 수업이 그 해 내내 너무 싫었다. 이렇게 적나라한 현실을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서, 우리 반 아이들이 무슨 권리가 있어서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건지, 그래야만 하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흠이 될 일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차이는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타의에 의해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환경이 낱낱이 공개되고 공유되는 것이 참  것 같다의 성급한 일반화에서 비롯한 무례한 발언들도 가세하니 더 최악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학교라는 곳은 더할나위 없이 평등한 공간이다. 줌 수업이 끝나고 보니 비로소 알 것 같다. 비교할 거리 없이, 눈치 볼 필요 없이, 부족함 없이 마음껏 뛰놀고 즐길 수 있는 더없이 편안한 공간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줌 수업에서 누군가의 방을 들여다볼 권리는 없다. 자신의 현실을 낱낱이 드러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왜 그런 상황인지 누군가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나는 줌 수업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이전 03화 계절의 옷차림을 가르쳐야 한다는 슬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