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인간관계를 맺는 일은 어렵고 까다롭기 마련이다. 더욱이, 학창 시절의 인간관계는 미숙하다는 점에서진정으로 쉽지 않다. 어린 시절을 한번 돌이켜보자. 또래 친구와 가까워지고, 둘도 없는 사이가 되고, 다시 서먹해지는 과정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웠던 감정은 무엇이었는가.
매년 교실에서 또래 관계를 맺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 그들의 마음속에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자라나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는 끓어오르는 감정과 투쟁하고 또 누군가는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을 받아들이거나 놓아준다. 그러나 이따금그 날 것의 감정들이 온 힘을 다해비뚤게표현될 때,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곤 한다. 특히, 누군가의 격려나 조언 하나 듣지 못한 채 혼자 키워온 감정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 해, 우리 반 해나가 가지고 있던 감정은 바로 '열등감'이었다.
해나는 함구증이 있는 아이였다. 무슨 이유인지 4학년 때까지 학교에서 말을 하지 않는 아이로 유명했고,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이 더해져 함께 지내는 친구가 없었다. 6학년이 되어 조금 나아졌다는 주변 선생님들의 평이 있었지만 아이는 관성처럼 늘 혼자 그림을 그렸고, 다른 아이들도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더욱이 학습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누구보다 수업을 열심히 듣고 공책 정리를 꼼꼼히 하는 편이었지만 막상 평가를 보면 대부분의 문제를 틀리기 일쑤였다.
해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늘 혼자였고, 무엇을 하든 마지막에 남아있는 아이였다.
학기 초, 선생님께만 드리는 비밀 설문지를 적는 시간이었다. 서른 개 정도의 질문이었는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난히 해나의 종이만 깨끗했다. 답변을 거의 비운 채 제출한 것이다. 그나마 적어놓은 몇 가지 내용도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잔뜩 흘려 써 알아보기 어려웠다.
[6학년 때 이루고 싶은 목표] 새로운 친구 사귀기
[가족에게 바라는 점]차별하지 않기, 공부로 혼내지 않기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의 성격]이라던가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같은 흔하디 흔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해나야, 여기 빈칸들은 잘 모르겠어서 못 적은 거야?"
"....."
대화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독촉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하염없이 해나의 답을 기다리는데 아이는 애꿎은 설문지 끝자락만 만지작거렸다. 몇 분이 흘렀을까 해나는 아주 작디작은, 한껏 집중하지 않으면 결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대답했다.
"...... 없어요"
어슴푸레, 해나의 마음에 어떤 힘겨운 감정이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그렇게 해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한 모습으로 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해나는 집에서도 아픈 손가락인 모양이었다.
"해나가 어릴 때부터 자신 있게 뭘 못하는 편이었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말을 안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병원에서 문제는 없대요. 저도 엄청 마음고생했고요."
상담을 시작하자마자 해나 어머니는 토로하듯 말을 쏟아냈다.
"네 어머니, 그래도 지금 많이 좋아진 거라고 들었어요. 혹시 이전에 다른 일은 없었을까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해나가 언니가 있고, 여동생이 있는 둘째인데요. 언니도 중학교에서 반장도 하고 공부도 꽤 잘하거든요. 여동생도 지금 거기 4학년인데 수학영재반도 다니고 자기 할 일 스스로 잘해요. 근데 해나만 유독 글도 늦게 읽고, 공부도 너무 어려워하고 그래요. 다 똑같이 키웠는데 유독 해나만..."
해나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아쉬움과 답답함이 묻어 나왔다.
"그래도 해나가 수업 시간에는 참 열심히 해요. 아이랑도 많이 대화해 주시죠?"
".... 하려고 노력은 해요."
"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많이 물어봐주시고, 공책 같은 것 보고 칭찬도 해주세요. 혹시 해나가 집에서 친구들 이야기도 하던가요?"
"아뇨. 워낙 친구 사귀는 것을 어려워했어서.. 이제 마음을 놓았는지 딱히 친구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해나가 적었던 올해 목표인 '새로운 친구 사귀기'가 눈에 어른거렸다. 가족과도 깊게 소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해나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자라나고 있을지, 마음의 문을 더 닫아버리면 어떻게 될지 걱정스러웠다. 확실한 것은, 해나는 집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크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다른 쪽에는 어디서나 환영받고 사랑받는 아이도 있는 법이다. 같은 반이었던 연우가 그랬다. 연우는 교내 운동부 소속 여학생이었는데, 일명 '만능캐릭터'였다. 밝고 사교적인 성격에 배려심 깊은 마음씨와 적당한 장난기를 갖춘 아이였다. 게다가 공부도 잘해서 친구들을 곧잘 도와주곤 했다.
그런 연우는 해나에게 유일하게 말을 붙이는 아이였다. 연우는 쉬는 시간마다 해나의 수학숙제를 도와줬고, 해나가 혼자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무슨 그림 그리고 있어?'라고 상냥히 말을 걸어주었다. 연우는 종종 보드게임을 할 때 해나를 끼워주기도 했고, 현장학습에서는 같은 모둠에 넣어 챙겨주기도 했다. 담임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상황이었고, 해나도 조금이나마 친구관계를 쌓아갈 수 있어서 안심이었다.
그러나, 그 해 여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점심시간에 한 여학생이 다가오더니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여자 화장실에요.. 네임펜으로 연우 욕 쓰여있어요"
정말이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연우는 누군가의 공분을 살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잔뜩 흘려 쓴 글씨체로 최연우가 잘난 척한다는 내용과 욕이 세 문장쯤 적혀있었다. 기함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밀조밀하고, 자음과 모음이 구별이 안될 정도로 흘려 쓴 글씨체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교실에 돌아와 공책을 비교해 보니 역시, 그 아이의 것이었다.
"여자 화장실에 낙서한 사람, 우리 반에 있지? 선생님은 글씨만 봐도 다 알아. 오늘 학교 끝나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최대한 큰 문제없이 끝내게 도와주고, 아니면 절차대로 진행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분위기를 무겁게 잡고 잔뜩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하교한 후, 예상했던 대로 그 아이가 찾아왔다. 해나였다. 해나는 잔뜩 머뭇거렸다.
"선생님께 할 말 있니?"
"....."
"....."
"그거... 제가 했어요"
"그거 뭐?"
"그.. 화장실에 쓴 거요"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에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왜 그랬어?"
"....."
다툼이 있을만한 관계도 아니었는데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연우는 해나를 유일하게 챙겨 준 은인 같은 존재 아니던가. 그런데 해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뭔가... 뭔가 잘 안되면 좋겠어서 그랬어요."
"뭐?"
"연우는 친구들이 많이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잖아요. 뭔가 화가 났어요."
머리를 '쾅'하고 맞은 것처럼 해나의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해나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단순한 부러움을 넘어 일종의 열등감처럼 보였다. 그것도 아주 참을 수 없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호의를 베풀어준 친구임에도 해나는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정말 잘못된 행동이자, 비뚤어지다못해 뒤틀려버린 최악의 행동이었다.
"그래도 해나야, 연우가 너에게 잘해줬잖아."
해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낙서 지우고 갈게요. 그리고 내일 사과 편지 써올게요."
한참 동안 해나를 혼내다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글부글 끓던 냄비 속 국물이 마구잡이로 흘러넘치듯, 마음속 끓어오르는 감정이 결국 흘러넘칠 때까지 혼자 방치된 것만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그리고 혼자 있는 친구가 신경쓰여 순수한 호의를 베푼 연우는 또 무슨 죄인가.
다음 날, 연우는 해나의 사과를 선뜻 받아주었다. 그렇지만 연우가 더 이상 해나를 찾아가진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은 학기가 끝날 때까지 데면데면하게 지내다 졸업을 했다.
때때로 어떤 마음은 승화되지 않고, 비극적으로 표현된다. 감정에 대한 경험이 낯설고, 표현방식이 어설픈 아이들이 표출하는 한 순간의 비뚤어진 말과 행동은 서로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긴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한 해나를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켜켜이 쌓여 왔을 것이라 예상되는 '열등감의 굴레'를 생각하면, 왜 아이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한편으로는 답답해진다.
사람마다 잘하는 것은 각기 다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빛나는 매력이 있다. 인정과 칭찬, 응원과 격려, 충분한 대화. 뻔하디 뻔한 이야기지만, 열세 살 해나의 마음을 주변 사람들이 조금만 더 돌아봐주었어도 아이가 편해질 여지는 충분히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