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단단 Apr 04. 2024

3년 후, 그 아이의 문제행동이 사라진 이유는



학교에서 아이의 잘못을 따끔하게 혼낼 있는 시대는 지났다. 친구에게 욕과 폭력을 사용해도, 어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도, 수업시간을 방해해도, 단체생활에서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아도, 아이가 잘못을 인정하고 행동을 개선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가르치기 어려운 세상이다. 


아이의 잘못을 훈계한 대가는 크다. 원활한 수업진행과 안전하고 상식적인 교실 만들기 위해 내뱉은 수많은 말과 행동은 언제 어디서 카로운 살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정서적 아동학대의 남발과 오로지 자신의 아이만 생각한 악의적인 민원들, '우리 아이는 상처받으면 안 된다'는 근거 없는 교육관의 확산은 교단에 선 이들을 움츠리게 만든다. 쓴소리 긁어 부스럼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미숙하고 서툰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경험도 적고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많은 아이들에게 실수나 그릇된 행동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변화할 기회는 있는 것일까.



낮은 가능성이지만, 있다.



단단히 박혀버린 못처럼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변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해답은 부모의 인정하는 마음, 받아들임에 있었다.









한 학년에 많아야 두세 반쯤 되는 작은 학교에 근무하다 보면 몇 년 전 담임했던 아이를 또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중 준표는 3학년과 6학년 때 우리 반이었다. 휴직하신 담임 선생님을 대신해 중간부터 3학년 담임으로 들어가게 된 상황에서 이전 선생님은 준표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으셨다.



"선생님, 준표라고 있어요. 아이도 힘든데, 어머니도 어려워요"



"네? 어머니는 왜요?"



"엄청 방어적이세요. 준표가 교실에서 욕하고 친구들 툭툭치고 그래서 갈등이 많거든요. 어머니께 살짝 말만 해도 절대 준표가 그럴 리가 없다고 다른 아이들이 먼저 그런 거라고 안 받아들이세요"



"그래요?"



"네. 집에서는 형노릇도 잘하고, 손 하나 안 가는 아이라고.. 작년 선생님도 계속 연락하셨다는데 결국 안 좋았나 봐요"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와 인정하지 않으려는 학부모 괴로운 조합이었다. 나와 반 아이들의 지난한 미래가 예상되었다.


처음 본 준표는 여느 아이들 못지않게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지 모범적으로 행동했다. 수업시간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단원평가 점수도 우수했다. 그런데 이 주일쯤 지났을까. 숨겨진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보드게임을 할 때 자신이 질 것 같으면 게임판을 죄다 흩뜨려놓고 도망을 갔다. 또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를 툭툭 발로 치거나, 욕을 해놓고 '너한테 한 거 아닌데?' 같은 말을 하며 친구들을 교묘하게 괴롭혔다. 게다가, 잘못을 했을 때 불러서 혼을 내면 절대 인정하지 않고 친구 탓을 했다. 그래도 추궁을 하면 붉어진 얼굴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노려봤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고, 자기 분을 못 이겨 난장판을 만들고, 선생님께 대들려는 모습은 하루빨리 고쳐야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 준표가 수업도 잘 듣고, 뭐든지 열심히 하려 해요. 그런데 워낙 승부욕이 강하고 욕심도 있어서 친구들과 갈등이 생길 때가 많아요"



"아, 준표가 칭찬받는 걸 좋아해서, 잘하고 싶어서 좀 욕심을 부릴 때가 있어요"



"모든 아이들이 칭찬받는 걸 좋아하죠. 그런데 말보다 행동이 앞서서 주변 친구들을 거칠게 대하는 경우가 있요. 친구들과 양보하며 즐겁게 어울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얘기해 주시는 게 필요해요"



".. 네? 그런데 준표가 먼저 그런 것이 확실한가요? 준표는 이유가 있어야 행동하거든요. 아마 그 친구가 먼저 준표를 건드렸을 거예요"




준표의 학교 생활을 넌지시 전달한 후 돌아온 대답들은 두꺼운 콘크리트 벽처럼 한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호의적이던 목소리가 갈수록 묘하게 날이 섰다. 준표가 먼저 시작한 일을 분명히 밝혔지만 그 원인을 거듭 다른 아이게서 찾으려 했다. 그렇다면 나도 애써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무탈하게 한 해 보내야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당연지사 문제행동 반복. 교탁 앞은 준표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아이들로 문전성시였다. 아무리 중재를 하고, 사과를 하고, 약속을 해도 준표는 기세등등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학년 말로 흘러가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준표의 어머니에게 갑작스레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의외의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저희 준표가 그렇게 심각한가요?







아니, 갑자기, 왜? 뜬금없다고 생각할만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발단은 공개수업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른 부모님들에게 여러 가지 불만 섞인 부탁을 들은 모양이었다. 3년 간 준표를 거쳐간 선생님들이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 사실들에 비로소 의문을 갖고 인정하려는 듯했다. 준표 어머니의 간절한 목소리와 함께 무력감과 씁쓸한 감정이 올라왔다. 




"선생님, 저희 준표가 그렇게 심각한가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보면 좀 나을까요?"



 

쏟아지는 질문 속에 준표의 모습들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수화기 너머로 조금의 신뢰와 받아들임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장시간의 통화 끝에 준표 어머니힘없는 목소리로 번 노력해 보겠다고 말했다. 아이가 아직 어리니 지금이라도 노력하면 많이 좋아질 것이라고 응원의 말을 건넨 것을 끝으로 그 해 마지막 통화를 끝냈다.


다행히도 남은 두 달은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새로운 급의 명부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보며 벌써 이 아이들이 6학년이 됐다는 마음에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데 그중 준표의 이름이 있었다. 3학년 때도 힘들었는데, 6학년이 된 준표는 얼마나 더 어려울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6학년의 준표는 변해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하는 행동과 말투가 180도 달라져있었다. 예전처럼 갑작스 화를 내는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었고, 친구들에게는 상냥하고 정중한 말투로 대했다. 표정도 3학년 때보다 훨씬 안정되어 보였다. 고학년이 되어 의젓해진 까닭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아이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문제행동이 있는 아이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강화되는 것은 봤어도,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변화한 것은 처음이었다. 환골탈태 그 자체였다. 오랜만에 통화한 준표 어머니에게 칭찬의 말을 잔뜩 늘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 준표가 3학년 때보다 너무 좋아졌어요"



"그래요? 다행이에요"



"제가 이전의 준표 모습을 봐서 알잖아요. 지금은 친구들에게 양보랑 배려도 잘하고, 갑자기 화내는 것도 없어지고, 너무 의젓하고 훌륭해요"



"잘 지내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크면 좀 나아지겠지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든 고쳐야 할 것 같아서 상담도 다녀보고, 공부도 많이 했어요. 준표도 다행히 잘 따라와 줘서.. 다행이에요"



그 해, 학교생활을 너무나 잘해낸 준표는 앞으로의 모습이 기대될 정도로 멋지게 성장해 졸업을 했다.






학교는 시행착오를 겪어보기 위한 공간이다. 사람들과 원만히 어울려 지내고, 법과 규칙을 지키고,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옳고 그름에 대한 상식적이고 엄격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도 수없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전달한 아이의 문제행동을 무한히 회피하거나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분들이 많다. 피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 어려워질 뿐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첫 번째 시작이다. 


어리기 때문에 기회가 있다. 제대로 혼을 내고, 가르치면 아이들은 변화할 수 있다.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