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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단단 Apr 25. 2024

모든 아이들은 사랑받아 마땅하다

<어느 교실의 멜랑꼴리아>를 마치며



교사가 되면 따뜻한 집에서 밥 잘 먹고 사랑받고 크는 아이들만 만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착각이었다. 첫 교직 문턱을 넘은 나에게 펼쳐진 교실의 모습은 우울했고, 배고팠고, 까마득했고, 슬펐다. 어떤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른들이 살아가는 세상보다 더 가혹했다.






참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국어나 수학이 아니라 계절에 따른 옷차림과 머리 감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아이도 있었고, 고작 열세 살밖에 안 됐음에도 엄마와 동생의 울타리가 되어 가장의 역할을 해내는 아이도 있었다.


코로나 시기에는 와이파이 설치조차 힘들어서 교실에서 홀로 온라인 수업에 참여한 아이도 있었고, 방에 책상이 없어 턱을 괸 채 수업을 듣는 아이도 있었다. 


학교에서 주는 하리보 젤리 하나를 고사리손에 꼭 쥐고 동생을 갖다 주겠다며 좋아했던 아이와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마음을 못 붙이고 비행청소년의 길로 빠져들었던 아이 눈에 선하다.



'가르침'을 기대하고 교직에 입문했건만, 막상 내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은 '수업을 어떻게 잘할까', '학급을 어떻게 잘 운영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등교시킬까' '누구에게 현장체험학습비를 원해줘야 할까'.



그래도 그때는 젊은 날의 패기가 있었고, 스스로 교사라는 역할에 지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과한 자의식을 갖고 5년을 보냈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했지만 결론적으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학교 밖에 있었으니 말이다. 점점 피폐해져 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그렇게 학교를 옮겨왔다.






이런 표현은 참 싫지만, 새로운 곳의 아이들은 참 아이들다웠다. 내가 생각했던 아이들의 모습과 꼭 닮아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표정에 눈망울에는 호기심이 잔뜩 일렁거렸고 입은 옷과 실내화는 깨끗했다. 수준차이는 있어도 웬만큼 기초적인 학습을 할 수 있었고, 잔뜩 싫다는 표정으로 부모님이 보내는 학원을 다녀도 자신이 좋아하는 피아노나 축구도 함께 배웠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는 가끔 되바라진 행동을 하더라도 혼낸 뒤 안아줄 수 있는 어른다운 어른이 있었다.



이상했다. 처음 맞닥뜨린 가감 없는 현실에 불공평하다는 감정이 . 출처 모를 억울함이 마음 한구석에서 불쑥 올라왔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지극히 당연한 불공평함이 억울했다. 이전의 아이들은 갖지 못하고, 받지 못한 게 너무 많았는데 이 모든 게 타고난 운이고 팔자라는 현실은 잔인했다.



<어느 교실의 멜랑꼴리아>는 그 마음에서 출발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든 아이들이 마냥 좋은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출발점이 분명 다른 아이들도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노력부족이나 능력부족으로 쉽게 재단해 버리기엔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다고, 누구는 쉽게 충족되는 그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꿈과 동화 따위가 아닌 우리 주변의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쓰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교실의 멜랑꼴리아>를 통해 나의 소회를 다 쏟아낸 것 같다. 글을 쓰며 천진난만하고 순수했던 그때 아이들을 다시 떠올렸다. 미숙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지만 금세 그것이 최선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을 여러 번 겪었다. 나에게 남은 일은 그저 아이들이 무탈하고 행복하길 마음속으로 응원해 주는 것이었다.


혹자는 이 글이 '불행 포르노'는 아니냐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불행한 이야기를 적은 것이 아니라 내가 마주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부디 보통의 시선에서 이 글이 읽혔길 바란다.



1화 <어느 교실의 토요코키즈>의 마지막 문단에 이런 글을 적었.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것, 일개 교사의 관심과 노력은 생각보다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조건, 가족이다.

가정환경이다.

그것이 전부다.


모든 아이들은 사랑받아 마땅하다.



17화까지 글을 쓰면서, 나는 결론적으로 아이들이 사랑받길 원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가정환경이 불안정해도, 형편이 어려워도 아이들은 한히 느 수 있는 랑과 지지만 있다면 그 나이에 맞게 분히 행복하게 자란다. 


태어난 모든 이는 고귀하고 사랑받아 마땅하다. 이 땅에 여행 온 모든 아이들이 부디 사랑으로 가득 찬 유년시절을 보내길, 삶의 오롯한 안정감과 행복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랄 수 있길,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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