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세상이 거대한 시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놀이터 구석에 페인트칠이 벗겨질락 말락 하던 그 시소 말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시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평했던 균형이 예측할 수 없게 무너지는 것도 싫었고, 무게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용을 써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머리가 크고 더 이상 놀이터의 시소를 억지로 탈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가끔, 나도 모르게 거대한 시소 위에 올라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것도 끊임없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시소말이다.
나는 허공의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 자리를 차지하려 이쪽저쪽 앉아본다. 다리를 동동 띄우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기회를 잡기 위해 애를 쓴다. 운이 좋아 유리한 집단에 끼게 되면 안도감과 성취감을 만끽한다. 그러나, 막상 이쪽과 저쪽 중 어느 쪽이 더 맞을지 생각해본 적은 없다. 시소를 왜 타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맞다. 시소는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세상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실랑이하는 단상이 시소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각을 미처 모르는 채 휩쓸리듯 시소를 탄다. 나도 '무지성 시소타기'의 일원으로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더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자신의 온전한 판단으로 시소를 타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소속과 이익, 흐름과 욕구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 있게 상황을 바라보는 이들 말이다.
뜻밖에도, 초등학교 교실에 그런 아이들이 있다.
그 해 5학년 교실의 두 남학생이 떠오른다. 지훈이와 윤수다.
지훈이는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선비 같은 아이였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묵묵히 성실했고 공부와 운동, 음악과 미술까지 고루 잘했다. 예의도 바르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아서 무엇이든지 믿고 맡길 수 있는 아이였다.
그에 비해 윤수는 지훈이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윤수는 또래 친구들에게는 '눈치 없이 오버하는 애'로 통했고 담임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나쁜 의도는 없었지만 지나치게 산만했고 주목받기 위해 일부러 과한 행동을 했다.
예를 들어 퀴즈를 풀 때 답을 큰 소리로 먼저 말한다던가, 놀이를 할 때 갑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을 만들어 시간을 끈다던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장난을 친다던가 하는 행동 말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튀어나오는 '눈치 없는 행동'은 놀림거리였다. 아이들은 윤수가 과하게 행동하거나 수업의 흐름을 끊을 때마다 핀잔을 주었고 '또 그런다'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윤수는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잠깐 주춤할 뿐, 오뚝이처럼 일어나 똑같이 날 선 눈빛을 쏘아붙였다.
어느 여름의 점심시간이었다. 5교시 시작 전,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에게 무언가 따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윤수에게 따지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피구를 하는데 윤수가 공에 맞고도 나가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다. 일단 자리로 돌아가 앉히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었다. 얼굴이 잔뜩 울그락불그락 해진 남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점심시간에 짝수 홀수 나눠서 피구 하는데요, 김윤수가 공을 맞고도 자꾸 안 나가요"
"맞아요! 김윤수가 자꾸 안 나가서 게임도 몇 번 못했어요"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들이 유독 윤수에게 박하게 구는 편이긴 했다. 바로 윤수에게 물었다.
"윤수가? 윤수야, 친구들 말이 맞니?"
"아니에요! 저 진짜 땅볼로 맞아서 아니라고 했는데 애들이 자꾸 나가라고 해요!"
억울하다는 듯 큰 소리로 외치는 윤수의 안경이 김이 서렸다.
"야, 김윤수 고집 좀 부리지 마. 땅볼이 아니라 발 맞고 땅에 맞은 거잖아"
"그니까, 인정할 건 인정 좀 해!"
"아 진짜 아니라니까? 왜 나한테만 그러냐?"
발끈한 몇몇 아이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윤수를 향해 쏘아붙였고, 윤수도 지지 않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하루에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인데 이렇게 양쪽이 조금도 굽히지 않으면 해결하기 참 난감하다.
"김윤수, 너 진짜 억지 좀 그만 부려!"
"맞아. 너 때문에 시간만 날렸잖아"
원성이 점점 더 거세졌다. 심지어 평소에는 조용히 관망하던 아이들도 너도 나도 한 마디씩 거들며 윤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동화 속 난쟁이들이 걸리버를 꽁꽁 묶어 움직일 수 없게 만들 듯, 윤수를 점점 조여 오고 있었다.
"맞아. 나도 아까 발에 공 맞은 거 본 것 같아"
"응응. 나도 봤는데 좀 그런 것 같더라"
심지어 피구를 하지 않았던 아이들까지 추측성 멘트를 남발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윤수의 얼굴은 억울함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지훈이가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윤지야, 너 아까 미끄럼틀 쪽에 있지 않았어? 거기서는 잘 안 보이는데 본 거 맞아?"
"아.. 그냥 그런 것 같다고"
윤지가 당황했는지 얼버무렸다. 곧이어 지훈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아까 공이 땅 쪽으로 세게 날아갔잖아. 윤수 말도 맞을 수 있는데 너무 심하게 몰아가는 것 아니야? 그리고 솔직히 우리도 애매한 상황에서 그냥 아웃 안 하고 하잖아 "
적막이 흘렀다. 지훈이의 말은 잔잔한 연못의 한가운데 떨어진 돌처럼 파장을 그렸다.
"그리고 윤수가 아웃이면 솔직히 우리도 다 아웃 아닐까? 윤수에게만 뭐라고 할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
스무 명의 아이들이 '윤수가 이번에도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라는 의견에 동조한 것과는 다르게 지훈이는 자신의 생각을 꿋꿋이 말하고 있었다.
불타올랐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윤수를 나무라던 아이들의 입이 꾹 닫힌 것을 보니 지훈이의 말이 켕기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딴청을 피웠다. 더 이상 개입할 건 없어 보였다. 윤수와 다른 아이 몇 명을 다음 쉬는 시간에 오라고 이른 뒤 수업을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지훈이는 평소에 크게 나서는 편도 아니거니와 윤수가 아닌 다른 아이들과 더 친했다. 그럼에도 어수선한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껏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지훈이는 무조건적으로 대세를 따르는, 군중 속에 묻힌 한 명이 아닌 교실의 중심에서 온전한 생각을 가진 한 사람으로 존재했다.
세상에는 하루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나는 여태껏 소신을 가지고 행동한 적이 있었을까. 아니 행동이 어렵다면 내 의지대로 '생각'해본 적은 있었을까. 가령, 귀찮다는 이유로,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움받기 싫다는 이유로 휩쓸림에 몸을 맡겨버린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거대한 시소에 올라타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상하운동을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누가 움직여주는 대로 행동하는 마리오네트가 아니다.
적어도 시소를 왜 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어느 쪽이 맞는 방향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소신은 권리이며, 자신의 심지를 똑바로 세우는 일이다. 한번 사는 인생,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으며 줏대 있게 살고 싶어진다.
[소신] 굳게 믿고 있는 바. 또는 생각하는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