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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Apr 26. 2024

2%의 가능성에 올인하다.

  그날부터 나는 엄마와 가끔 만나 밥을 먹었다. 어느 날 엄마는 식사자리에서 나에게 키다리아저씨를 소개해주셨다. 이름 있는 기업에서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신 분이라고 하셨다. 키다리아저씨는 내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셨고, 나는 조심스럽게 수능시험을 한 번 쳐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키다리아저씨께서는 '약학대학'을 추천하셨다. 네가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만약 약사가 된다면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직 군기가 다 빠지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속으로 '어차피 약학대학을 가야 한다면 이왕이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가는 게 낫겠지.'라고 생각했다. 키다리아저씨께서는 앞으로 6개월 동안 30만원씩 후원해줄테니 한 번 열심히 공부해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 인생에 다신 오지 않을 소중한 기회라는 확신이 들었다.


  며칠 후 나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집으로 걸어오면서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갈 수 있을까요?"

  "지금 제 실력으로는 98% 떨어질 것 같아요."

  "만약 붙여만 주신다면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가능하다면 신약도 개발해볼게요."


  내가 가진 무기는 오직 '믿음' 밖에 없었다. 나라도 나 자신을 믿어주어야 했다 "나는 할 수 있다"라고 격려해주어야 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나는 두려웠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 외로웠다. 오직 기회는 단 한번 뿐이었다. 나는 비바람 치는 벼랑 끝에 홀로 매달려있는 작은 동물 같았다.


  집에 가서 할머니와 아버지께도 내 계획을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경북대학교 복학을 권유하셨다. 할머니께서는 내게 "왜 힘들게 또 공부할라카노"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두 분께 6개월도 안 남았으니 딱 한 번만 허락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집에서는 집안형편상 한 달에 30만원밖에 줄 수 없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학원비로 한 달에 30만원, 식비와 생활비로 한 달에 30만원, 합쳐서 정확하게 60만원이 필요했다.


  수능날짜는 11월 17일. 5월말이 되자 내 마음은 다급해졌다. 당장 6월부터 등록할 재수학원을 알아봐야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던 원이에게 연락했다. 원이는 어릴 때부터 뭐든지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경기용 글라이더를 잘 만들었다. 내 기억 속의 원이는 발명대회에 나갈 만큼 똑똑한 친구였다.


  원이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고마웠다. 원이는 삼수 끝에 경북대학교에 들어가 공부중이라고 말했다. 삼수라니 의외였다. 물어본 내가 괜히 미안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원이는 자기 친구 '데미안'을 소개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장소는 대구 중앙로 근처의 양식집이었다. 원이는 나에게 데미안이라는 친구를 소개시켜주었다. 실명이 아니라 가명을 사용하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라고 생각했다. 데미안은 원이가 삼수하면서 만난 친구였는데, 또래 친구들에 비해 약간 성숙한 느낌을 풍겼다.


  나는 속으로 '그런데 이 친구는 왜 데려왔지?'라고 생각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재수학원이라는 주제를 던지자 원이는 조심스럽게 데미안이 현재 육수생이라고 밝혔다. 나는 많이 놀랐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만큼. 데미안은 기분 나빴을텐데도 내색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의사가 되기 위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다섯 번의 수능을 치렀다. 2000년도 수능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지만, 운이 나쁘게도 의대에 들어가기에는 살짝 부족한 점수였다. 그렇게 한해 한해 재도전한 데미안은 어느새 육수생이 되어있었다. 데미안은 매해 학원을 바꿔 다녔기 때문에, 거의 모든 재수학원 선생님들을 다 알고 있었다.


  올해 데미안이 선택한 학원은 '송원학원'이었다. 데미안 뿐만 아니라 원이도 송원학원이 가장 실력 있는 선생님들이 모인 학원이라고 자신 있게 설명했다. 데미안은 혹시 내가 송원학원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도와주겠노라 약속해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자기가 도대체 뭘 도와줄 수 있다는거지?'라고 생각하며 흘려들었다.

 

  송원학원은 특별반, 서울대반, 연세대 및 고려대반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내 목표는 서울대. 나는 오직 서울대반에 들어가길 원했다. 다른 곳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학원에 들어가 입학상담을 요청하니 잠시 후 입학담당 선생님께서 오셨다. 6월 입학생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나를 유심히 관찰하셨다. 나는 아직도 군대말투를 고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나까'를 연발하고 있었다.

 

  "저 서울대반에 들어가고 싶은데 말입니다."

  "안 돼. 서울대반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반이 아니야."

  "왜 안 됩니까?" 

  "최근에 모의고사 친 적 있어?"

  "없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뭐 했어?" 

  "군복무 마치고 왔는데 말입니다."

  "안 돼."


  입학담당 선생님은 약간 싫은 티를 내셨다. 선생님은 만약 내가 서울대반에 들어간다면 학습 분위기를 망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무시당해 기분이 나빴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제 내가 쓸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쓸 차례였다. 나는 곧바로 데미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맙게도 데미안은 곧바로 사무실로 달려와 입학담당 선생님께 나를 자기 친구라고 소개했다. 나는 민망해서 바깥으로 나가 기다렸다. 데미안은 한참동안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더니,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놀랍게도 선생님이 서울대반 입학서류를 가지고 오시는 게 아닌가! 나는 데미안의 위대함을 경험했다. 이후 나는 그를 은인으로 여겼으며, 단 한 번도 나는 그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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