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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May 02. 2024

나의 특기는 정신승리

똑같은 전략으로 한 달 더 공부했다. 어느 날은 수학 열두 문제를 풀고 자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공식이 생각나지 않았고, 풀이 과정도 번번이 막혔다. 마치 커다란 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나는 자존심이 상해 오기를 부렸다. 모든 문제를 다 풀었을 때 새벽 4:30이었다. 내 기상시간 알람이 울렸고, 나는 평소와 같이 일어나 학원 갈 준비를 했다.

 

  나는 학원 가는 버스 안에서 영어듣기를 했다. 학원에 도착하니 아침 6시 15분. 다행히 학원문은 열려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넓은 교실에 오직 나 혼자였다. 너무 긴장돼서 잠은 오지 않고, 머리가 계속 지끈지끈 아팠다. 너무 답답해서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그날 하루를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자야 할 것 같아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이 공부하는 모습만 보면 나는 또 긴장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날도 집에 가서 새벽 1:30까지 언어영역을 공부했다. 중고책방에서 구입한 두꺼운 언어영역 종합문제집이었다. 이불 위에 누워서 내가 몇 시간 동안 깨어서 공부했는지 계산해보았다. 무려 45시간이었다. 아마 45시간 중 40시간은 공부하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화장실에 있었던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나는 어떻게든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두 달간의 연속된 수면부족으로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군대에서 비축해둔 체력은 이미 소진된 지 오래였다. 항상 머리는 깨질듯이 아팠고, 가끔 어지러웠으며, 설사와 변비가 번갈아가며 찾아왔다.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번아웃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쉴 수가 없었다. 수능이 이제 4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가능'이라는 세 글자가 무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수능 공부 이후 찾아온 첫 번째 위기였다. 나는 다음의 세 가지 방법으로 이 위기를 돌파했다.


  첫째로, 나는 군대에서 '7막7장'과 '비상'이란 책을 읽고 배운 핵심메시지를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였다. 

  

  공부 열심히 해서 죽었다는 사람 주변에서 본 적 있는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절대 죽지 않는다. 

  그러니 죽을 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네 꿈을 이뤄라!   


  둘째로, 집 앞 약국에 가서 약사님께 이렇게 부탁드렸다.


  "약사님, 저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저 좀 살려주세요."

  "손님, 왜 그러세요?" 

  "제가 수능 공부를 하는데 너무 열심히 해서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 


  약사님은 약간 놀라신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난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는 내가 죽더라도 놓칠 수 없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 나는 정말 절박했다. 약사님은 내게 종합비타민 4개월분을 권해주셨다. 4만원이었다. 나는 비상금을 사용했다. 내 몸을 위해 꼭 필요한 투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나는 매일 기도했다. 순간순간마다, 매주마다, 매달마다 기도했다. 당장 닥칠 미래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불안했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드렸고, 내가 미래의 서울대 약대생이 될 것이라 확신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이어리 맨 앞쪽에 내 미래의 수능 점수를 미리 적어두었다.


  언어 - 90점 

  수학 - 95점  

  영어 - 95점 

  과학 - 195점 

  총점 - 475점


  500점 만점에 475점. 당시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최고점이었다. 만약 내가 수능 시험에서 475점을 받는다면 서울대 약대에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어리석게도 서울대에서 수시 전형, 정시 전형, 지역균형 전형으로 각각 몇 명을 뽑는지 검색하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합격할 수 있는 확률도 계산하지 않았다. 단순히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조건 서울대 합격자 중 한 자리는 내 꺼다. 난 언젠가 서울대반 1등이 될 것이다.'


  종합 영양제를 먹고 나는 기운이 반짝 났다. 몸에 활기가 돌자 나는 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7월 모의고사에서 내가 1등하면 어떡하지?' 가만히 보면 나는 참 특이한 사람이다. 최악의 상황인데도 그런 느긋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음에 누가 나의 특기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겠다. "제 특기요? '정신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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