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커피는

나와 함께하는 친구였습니다.

by 태화강고래


난 커피를 참 좋아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 나를 흔드는 커피의 유혹이 느껴진다. 개인 카페, 스타벅스와 이디야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 메가와 컴포즈 같은 테이크아웃 카페까지... 커피 없는 한국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루의 시작은 모닝커피"라는 습관 아닌 습관이 내 몸에도 착 붙었다. 카페인 섭취를 줄여야겠다는 결심은 하는데 실천은 매번 실패로 돌아간다. 나만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심심찮게 한국의 커피소비량에 대한 기사가 등장할 때마다 숫자로 재확인한다. 한국인의 연간 커피 소비량은 성인 1명당 367잔 (2020년 기준)으로 1위인 프랑스(551.4잔)에 이어 2위 수준. 이는 전 세계 평균(161잔)의 2배가 넘는 수치라고

https://www.moneys.co.kr/news/mwView.php?no=2023090115371665805&code=w0405


그래서 생각해 봤다. 언제부터 난 커피를 마시게 되었지?

정확히 말하면 "커피 우유"로 커피 세상에 발을 들였다. 1990년대 초 고등학생이던 나는 서울우유에서 만든 커피우유로 아침 자습시간을 시작했다. 달달한 맛에 기분이 좋아지면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몸속으로 퍼져갔다. 모닝커피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3년간 커피우유를 마시며 약간의 카페인 섭취를 하고 대학생이 된 후 하루 2-3잔씩 자판기 커피와 캔커피를 마시며 카페인을 주입했다. 도서관 앞에서 친구, 선후배들과 마시는 자판기 커피는 달달한 맛 자체보다는 그 시절의 낭만과 고민을 서로 공유하는 추억의 맛이었다.


1997년 매일 카페라테가 출시되었다. 국내 최초 컵커피 제품으로 커피우유와 다른 고급스러운 느낌과 맛을 자랑했다. 좀 더 커피에 가까운 그 음료에 빠졌다. 이후로 비슷한 컵커피들이 우르르 시장에 몰려나왔지만 내 취향은 변함없었다. 1999년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스타벅스 1호점이 문을 열었다. 스타벅스! 여대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 이국적이고 깔끔한 카페였다. 다방문화에 익숙하지 않던 우리들은 프랜차이즈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멋스러운 이미지와 함께 카페라테, 카푸치노 등 다양한 베리에이션 커피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스타벅스만을 경험하고 2000년대 초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동안 원두커피 붐이 일어나면서 2001년 커피빈, 이디야, 탐앤탐스가 개점을 시작했다. 2002년 투썸플레이스와 파스쿠찌, 2006년 엔제리너스, 2008년 카페베네가 오픈하면서 2000년대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시대였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커피전문점에서 어딜 가나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넣은 라테를 선택했다. 커피 원두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부드러운 라테 맛으로 커피전문점의 선호도가 생겼다. 지인을 만나거나 쉬고 싶을 때 가끔 스타벅스를 찾는 호사를 누렸다. 결혼 후에는 혼자만의 시간이 없었다. 커피 한잔의 여유라는 게 없이 살았다.


울산에 살고 암과 동행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카페 커피의 존재 가치가 달라졌다. 우선 우유가 많이 들어가는 라테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여자가 우유를 끊어야 하는 이유"라는 영국 여성 과학자의 유방암 투병기를 읽고 나서 유제품을 다 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제인 플랜트는 "젖소나 염소 등 모든 낙농 동물에서 나온 고기와 모든 종류의 유제품을 식단에서 완전히 배제하라는 것이다.... 암 환자라면 동물성 식품보다는 채식을 실천해야 한다.(167)"고 주장한다. 여전히 우유와 암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쟁은 결말이 없는 듯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접한 뒤 유제품은 멀리하고 있다. 그런데 우유를 마시지는 않으나 우유가 들어가는 라테는 마신다. 라테를 단칼에 끊지 못해 대신 우유의 양을 적게 한 플랫화이트를 마시기 시작했다. 라테와 플랫화이트의 우유 양이 얼마나 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감정의 동물인 나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플랫화이트 쪽으로 넘어갔다. 스타벅스와 이디야의 밍밍하고 우유양이 많은 라테는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플랫화이트를 고르지만, 없을 때는 "우유 적에 넣어주세요"를 외치며 가끔 라테를 주문하고, 그것도 아니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암이 다시 재발할까 두려워 1주일에 한 번 마시던 라테가 2번이 되고 3번까지 되면 가슴을 졸이기까지 했지만, 끊을 수 없었다. 라테와 아메리카노를 번갈아 마시면서 카페인 섭취를 이어갔다. 수많은 베리에이션 커피가 있으나 오직 두 가지만 마신다. 원두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집에서는 드립커피를 마신다. 그냥 아메리카노가 아닌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와 케냐 AA를 가장 좋아한다. 마시다 보니 커피 쫌 아는 사람이 되었다.



"커피는 단지 음료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다. 커피는 일어나고 있는 어떤 현상이다. 커피는 시간을

주지만,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커피 인문학>>, 박영순, 인물과 사상사, 2017, 124쪽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



즐겁게 마시면 괜찮다고, 울산에서 친구 없이 외로우니까, 오늘은 기분이 우울하니까, 축하할 일이 있으니까라고 나에게 말하며 일주일에 많게는 3-4번 혼자 커피를 마시러 다녔다. 커피를 감정적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40여 년을 살면서 어딘가 중독된 경험이라고는 없던 나인데, 카페 커피에 중독되어 갔다. 에스프레소 위에 우유 그림이 그려진 라테 한잔이 묘하게 기분을 업시켜주는, 집과는 다른 편안함을 주는 카페가 좋았다. 대형 카페보다는 동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카오스토리에 기록한 나의 커피 일기는 차고 넘쳤다. 유방암 진단이라는 슬픔을 삭이기 위해, 마지막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자축하려고, 녹내장 진단의 충격을 천천히 흡수하기 위해 마셨던 커피의 기억은 기록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항상 혼자였기에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만이 오롯이 내 편인 내 친구가 되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위로하거나 칭찬해 주면서, 스스로 단단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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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마신 라테


"잔속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마냥 바라보며 여러분 속에 내재된 또 하나의 나와 교감을 나누며 이렇

게 격려해 주시면 어떨까요, 그래, 나는 잘 살고 있어. 내가 항상 지켜봐 줄게.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자, 그리고 매 순간 행복하자."

<<커피 인문학>>, 박영순, 인물과 사상사, 2017, 125쪽 앤 모로 린드버그의 말



울산에서 커피는 나의 친구였다. 암 경험자로서, 코로나 19 시기를 살아가는 외지인으로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만나게 해 주었다. 책을 읽고 유튜브 강의를 들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냈다. 혼밥, 혼쇼핑 혼산책, 혼커피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을 하고, 산책을 하고, 기분을 살리고, 내일을 생각했다. 가끔 커피값이 아깝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기회비용이라는 게 있으니 너무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친구 만나러 가는데 그 정도 커피값이야 내가 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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