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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익은 글 항아리 앞에서

by 이소희

내 글이 김치라면, 어쩌면 ‘덜 익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김치라고 담갔지만 아직 깊은 맛이 나지 않는다. 며칠을 고민해 완성한 원고를 읽어보면 어딘가 부족한 기운이 스친다. 혹시 서두가 밋밋했나, 전개가 싱거웠나.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은 아직 깊은 맛이 덜 밴 듯하다.


처음엔 확신에 차서 썼던 말들이 과하게 느껴진다. 때론 솔직함이 불편함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분명 내 손으로 쓴 글인데도 낯설고, ‘왜 저렇게 썼을까’ 되묻게 된다. 그래서 글도 김치처럼, 뚜껑을 덮어두는 시간이 필요하다. 완성한 원고는 며칠쯤 잊고 지냈다가 다시 읽는 게 좋다. 잠시 거리를 두면 처음엔 보이지 않던 부분이 드러나고,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소리 내어 읽어보면 문장의 리듬과 군더더기, 단어의 불필요한 반복까지 귀에 걸린다. 이렇게 숙성의 시간을 거친 글은 비로소 속까지 맛이 들고 한층 단단해진다.


나는 프란츠 카프카를 좋아한다. 그의 글에는 세상과 거리를 두면서도 인간의 고독과 불안을 끝까지 응시하는 힘이 있다. 살아생전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그는 대표작 『변신』조차 출간 당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세상을 떠난 뒤, 원고를 불태워 달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친구 맥스 브로드는 그의 글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세월을 건너 이제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는다. 빈센트 반 고흐도 생전에 작품은 단 한 점만 팔렸을 뿐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시간을 믿게 한다. 예술이 제 빛을 내기까지는, 종종 우리의 시간보다 더디게 흐르기도 한다.


물론, 내가 그들처럼 위대한 작가는 아니다. 다만, 반응이 없다고 해서 글이 무가치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치가 저절로 맛이 드는 게 아니듯, 글도 쓰는 사람과 함께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제 맛이 난다.

재능은 흔히 타고난 능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글을 쓰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긴 정체기를 겪는다. 그 시기를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며 계속 써 내려가는 힘, 바로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재능이다. 씨앗이 땅속에서 싹을 틔우기 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를 길게 뻗듯이, 그 힘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기다림을 헛된 시간으로 보지 않는다.


밤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별빛조차 4광년 떨어져 있다. 우리가 오늘 보는 그 빛은 4년 전에 그 별을 떠난 것이다. 어떤 별은 이미 사라졌어도, 그 빛은 여전히 우주를 건너 우리 눈에 닿는다. 좋은 문장도 마찬가지다. 오늘 쓴 한 줄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래도 답답할 땐 의자에서 일어난다.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는 뻣뻣해지고, 머릿속 생각은 막힌 하수관처럼 흐르지 않는다. 잠시 글 쓰기를 중단하고 산책을 나선다. 햇살이 드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시원한 공기가 폐를 채우고 내쉴 때 가슴속 답답함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이렇게 하루, 이틀 후면 막혔던 글이 다시 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반응이 없던 글도 결국은 나를 쓰는 사람으로 만드는 소중한 재료가 된다. 덜 익은 감정과 설익은 문장은 다음 맛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덜 익은 글’을 품에 안고 걷는다. 언젠가 이 글이, 그리고 이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제 맛을 낼 그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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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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