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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Oct 31. 2021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실 이때의 기억은 그저 빛바랜 사진 몇 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다.

이사를 하고 환경이 바뀐 후 적응을 하기도 전에 가족들 짜기라도 한 듯이 내게 등을 돌렸다. 

아픈 나를 보며 달라지려 노력할 거라 믿었던 남편은 전혀 변한 것 없이 또 한 번 뼈아픈 실책을 범하여 내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놨다. 그리고 그 마음이 수습되기도 전에 알게 된 딸의 희귀 난치 질환은 나를 순식간에  깊은 나락으로 빠지게 만들었.

딸을 위해 살아야 하기도 했고 딸을 위해 죽고 싶기도 했다.


기억하는 날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 갔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화장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는 어떤 날은 불경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가 어떤 날은 찬양가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가 어떤 날은 귀신 소리가 들린다며 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미쳐가는 게 아닐까 나는 겁에 질리고 딸은 두려움에 떨다.


CRPS 통증의 강도도 점점 세져 갔다. 강도도 세지고 빈도도 잦아진 데다 통증을 느끼는 시간도 늘어나면서 복용하는 마약 진통제의 양이 늘어나자 옆에서 딸이 바짝 붙어 앉아 간호하고 있을 때조차도 현관문 바깥으로 딸이 나가고 있다며 딸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부르며 몸부림쳐댔다. 환청과 환시가 나타나는 부작용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아파서 울고 불며 몸부림치고 딸은 엄마가 잘못될 것 같아 나를 안고 울며 몸부림쳤다.


처음엔 하루에 두세 번이던 기절 횟수도 하루에 십 수 번 이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장소를 불문하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샤워조차 혼자 못할 정도로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혀서 구급대를 부르고 갈비뼈가 부러져서 응급실 려갔다.

CT를 찍고 엑스레이를 찍는 것이 일상처럼 반복되 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심했던 두통은 CRPS를 만나고선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통증 정도를 설명하는 단계 1~10


평소에 6~7단계였던 두통은 CRPS를 만나고선 8~9 이하 단계로 떨어져 본 적이 없게 돼 버렸다.(물론 CRPS는 돌발통시 항상 10 이상이에요. 그냥 삶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내가 살아 있는 건지 죽어가는 건지...)

일주일에 4~5일이던 두통도 일주일 내내, 한 달 내내 앓게 돼버렸다. 계속되는 구토에 입맛을 잃어 음식을 먹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시간을 오롯이 함께 한건 나와 딸 ♥♥이, 그리고 누나를 도우며 엄마를 지킨 강아지 콩이뿐이었다. 아! 애교 담당 우리 막내 강아지 리아.


함께 살았지만 남편은 방관자였다.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돈은 벌어 왔다.

그 돈으로 집안 경제를 관리 하 집안 살림도 모두 맡겨 버리 엄마 병간호는 당연한 일인듯  모든 것을 아픈 딸에게  내 맡겨 버렸다.

친정 부모님께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고, 내게 사과하지도 았으며, 자신을 희생하지도 않았다.

그냥 우리 옆에 살았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은 혼자서 외출할 수 없어지고 잦은 기절 탓에 병원에서 휠체어를 강권한 후에 딸은 학교를 휴학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한 자신의 병을 위한 휴식'이었지만 사실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는 엄마를 잃지 않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납득할 수도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미쳐가고 있을진 몰라도 바보가 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창창한 딸의 미래를 희생시키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의논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 온 딸에게 바보처럼 마구 화를 내고 말았다.


"너까지 날 우습게 보는구나. 누구 맘대로 휴학이야? 누가 너더러 엄마 간병하래? 죽든 살든 신경 꺼. 네 맘대로 하고 살 거면 너도 네 눈앞에서 없어져. 다 필요 없어."

"엄마, 그런 게 아냐. 먼저 말 못 해서 미안해.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라 의논할 상황이 아니었어. 그리고 엄마 때문에만 휴학한 것도 아니고. 엄마도 아픈데 나까지 아프니까 조금 쉬고 싶어서.... 그래서 휴학한 거야. 한 학기만 쉬고 다시 등록할게. 자꾸 화내지 마. 그러다 또 쓰러져."


딸의 말을 듣고 생각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마음과 말은 자꾸 엇나가게 굴고 있었다.

내가 딸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없다면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길 일도, 사랑 없는 남편과 얼굴을 마주 보며 살아갈 일도, 아픈 자식이 나를 간병하게 만들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 믿어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날 밤 남편과 딸이 잠든 시간에 술과 모아둔 약을 먹어야겠다고.


남편은 항상 그렇듯 이른 시간에 곯아떨어졌다.

천장을 뚫기라도 할 듯 우렁찬 코 고는 소리에 두통이 심해져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두통이 심해지고 불면증이 악화된 뒤로 남편과 각방을 쓴 지는 오래돼버렸다. 원래도 지나치게 냄새에 예민했던 코는 몸이 아파진 뒤로 훨씬 더 예민해져 남편에게 나는 희미한 담배냄새조차 견딜 수 없어졌다.


그런데 그날따라 딸이 일찍 잠들지 않고 거실에 앉자 오래도록 TV를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하루 종일 내 뒤치닥 거리를 하느라 10시만 넘기면 씻고 잠자리에 들기 바쁠 만큼 고된 일과를 보내기 때문에 TV는커녕 휴대폰도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도 없는 딸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안방 문에서 살짝 내다보아도 TV 불빛이 일렁거리며 볼륨도 크게 틀어놓고 있어 약을 가지러 나갈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죽을 결심을 했더라도 딸이 보고 있는 앞에서 약과 술을 챙겨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을 문을 열어보았는지 모른다. 딸의 모습이 바로 보이진 않았지만 화면의 일렁 거림과 불빛의 번쩍 거림이 주방 쪽 벽에 고스란히 반사되어 비쳤다.(남편 방에는 TV가 따로 있습니다.)

볼륨을 얼마나 높여 놨는지 TV가 붙어 있는 벽이 쿵쿵 울릴 정도였다.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죽고 싶어 하는 내 속마음을 딸이 눈치챌 것 같았다.

수면제도 먹지 않고 기다리며 기억한 시간이 새벽 4시 20분 정도였을까 어느 결엔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었나 보다.

다음 날 오전 늦게 깜짝 놀라서 일어나 앉아 어젯밤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딸을 불렀다.


"◇◇야. 어제 엄마랑 얘기하고 좀 안 좋았는데 왜 일찍 안 자고 새벽까지 TV 보고 있었어? 생전 안 그러더니 벽이 다 울리도록 볼륨도 크게 해 놓고. 안 피곤했어?"

"어? 아닌데. 나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자긴 했지만 12시 전에 잤는데. 씻고 리아 데리고 들어가서 조금 놀아주 바로 잤어. 학교 갔다 오고 좀 힘들어서. 왜 엄마? 나 찾았어? 전화하지. 그리고 엄마, TV 있는 쪽에 붙박이 장 있잖아. TV 소리 울리지 않을 텐데.... 다른 집 소리가 들렸나? 내가 지금 TV 크게 틀어 볼까?"


딸의 말을 듣고는 딸에게 러 번 확인을 했다.

그리고 TV를 틀어 방안에는 TV 소리가 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랬다면 내가 어젯밤에 세 번, 네 번 확인한 TV 화면의 움직임과 빛, 소리는 어떻게 됐던 것일까? 그저 내 환각이나 환청, 환시에 불과했던 걸까?


온 세상이 나를 버렸지만, 심지어 나도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믿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품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혼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희망을 품으려 할 때 운명은 또 한 번 나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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