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나루 Nov 27. 2021

비수 같은 딸의 한 마디

"아빠는 나도 병들게 만들었어..."

방송은 신기루 같았다.


회전근개 파열 수술의 후유증으로 CRPS를 진단받은 후 세상으로부터 모습을 감춘  이렇듯 단 시간에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켜 본 적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방송의 위력은 대단했다. 평생이라 말할 수 있는 세월을 살아오던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잠시 정착하며 여러 가지 사건들로 적응은 고사하고 하루하루를 '이방인'이라는 느낌으로 간신히 살아던 우리를 동네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했다.

많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연락을 끊다시피 한 친구들과 한때 가까웠던 지인들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의 전화를 받았고 딸과 콩이는 동네에서 강아지를 기르시는 분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인사를 받았다.

우리가 다니던 모교회에서는 예배 후 광고로 방송을 보라고 해주셔서 본의 아니게 교회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연락도 많이 받게 되었다.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건강을 염려해주고 쾌유를 빌어주며 콩이의 헌신을 기특하게 여겨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 내 옆에서 나를 지키며 간호한 딸을 격려하며 칭찬하고 위로 말을 잊지 않아 주었다. 유튜브로 올라온 영상과 sns에 공유된 소식에도 많은 분들이 쾌유를 빌어주고 기도를 보태 주었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사소한 행동들이었지만 겐 파도 같은 위로였다. 천둥 같은 감격이었고 태풍 같은 사랑이었다. 그런 모든 일들이 절망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내게 작은 온기를 보태기 시작했다.


정말로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런 노력을 다시 해봐도 되는 걸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의심 많던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CRPS를 진단받기 한참 전부터 내가 좋아하다 못해 미치도록 사랑하던 찬양대를 포기하고 말았다. 노래는 고사하고 예배를 위해 앉아있는 두세 시간을 견디지 못할 만큼 몸 상태 급격히 나빠졌다. 라져 가는 내 모습과 깊어져 가는 마음의 상처로 온 마음을 다했던 신앙마저 흔들려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챙기고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과 모두에게 잊혔으면 하는 바람이 동시에 나를 괴롭혀 매일이 슬픈 날들이었다. 


그전에 있던 병은 차치하고라도 crps 발병 이후에 비켜갈 수 없었던 연이은 불행들은 결국 나를 죽음으로 몰아갔고 다시 살아긴 했지만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병원에서 나를 살려낸 후엔 죽지 못해 숨만 쉬며 1년 반 넘는 시간을 보냈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잠인지 혼수상태인지 모르겠는 혼곤한 시간들 이어졌다. 그대로  다시 나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길고 길었던 불행의 시간들을 떨쳐내고 다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건 어느 날 딸이 내게 무심코 던진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엄마. 엄마가 여러 가지 말할 수도 없이 힘든 일 많이 겪고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세상에 그런 병이 있는 줄도 몰랐을 병들에 걸려 지금은 다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 너무 잘 알아. 아마 내가 엄마였다면 난 엄마보다 훨씬 심하게 망가졌을 거야. 엄마가 방송 촬영 하기만 한 것도 정말 대단한 결심이었다는 것도 알고. 엄마가 큰 결심 해줘서 콩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이쁜 영상 남길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콩이가 엄마 아플 때 고생한 거 항상 마음 아프고 속상했는데 엄마가 잠깐이라도 기운 차린 모습 보여주니까 너무 좋아해서 그것도 다행이다 싶고... 엄마. 사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그래도 좀 쉬운 법 이잖아. 이렇게 계기가 됐을 때 뭐라도 조금씩 해서 기운 차리는데 도움 되는 일 해보자. 지금 아니면 또 어려울 것 같아."

"그게 뭔데. 뭐가 됐든 엄마 못할 거야. 이렇게 아픈 머리로? 약물에 찌들어 머리에 생각한 단어랑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전혀 다른데 하기는 뭘 해? 끼니는 자발적으로 1일 1식이고 그마저도 못 먹는 날 허다해서 혼자서는 30분도 앉아 있지 못하고 어쩌다 먹으면 두배, 세배로 토하기 바쁜데? 아직도 돌발통만 생기면 비명 지르고 울기 바쁘고. 시도 때도 없이 기절해 대는데 도대체 뭘 할 수 있어? 엄만 망가졌어. 병도 한두 가지 라야 어떻게 해보지. 한 번 죽기도 해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하는지 의사들도 모를 걸?"


나는 비록 약에 취해 어눌한 말투였지만 시니컬하다 못해 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억을 잃고 다른 시간대의 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감정 기복이 심하고 아직도 스스 다스릴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했지만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딸이 뜻밖의 얘기를 꺼내 놓았다.


"엄마. 내 병이 왜 생겼다고 생각해? 이 병(MS-다발성 경화증)은 유전도 아니고 다른 병의 후유증이거나 약의 부작용도 아닌거 알잖아. 완전히 후천으로 생기는, 그것도 아직 원인도 제대로 밝히지 못한 그런 병이야. 가장 큰 원인을 굳이 꼽으라면 스트레스?라고 하더라고. 내가 25살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엄마가 아프고 힘든 이유를 나한테 얘기하지 않고 아빠를 미워하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살았는지는 너무 잘 알지.엄마가 정말 고생 많았어. 그런데도 난 사춘기 때 아빠가 정말 싫었어. 이유도 없이. 그때는 그냥 아빠가 철이 없는 것 같았어. 아빠가 이사할 때 그렇게 큰 실수를 하고도 사과 한번 없이 살고 엄마나 다른 가족들하고 멀어지고 엄마가 이렇게 아파지는 걸 보면서 알게 됐어.

내가 이런 무서운 병에 걸린 건 아빠 탓이라는 걸. 내가 아빠를 싫어 했던 거엔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걸. 엄마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이렇게 살다가 잘못된다면 나는 죽어도 아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딸이 하는 말을 들으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맞는 말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따로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 됐든 딸의 마음에 박힌 가시를 뽑아 주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내 자식을 지켜야 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자식의 마음에 박힌 가시를 뽑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깊이 겨졌다.


"그런 게 아니야. 하... 엄마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엄마가  있을까?

"그게 말이야. 엄마. 내가 생각해 본 게 있는데...."


어떤 방법이었든 딸이 또 나를 붙잡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내게 던져 주었다.

새로운 도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성공과 실패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갈 이유 중 하나이기만 해도 좋았다.





to be continued....









 


이전 08화 6년 만의 산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