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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Jun 07. 2024

이혼을 결심하고 친정을 찾아간 날

그간의 일을 처음 얘기할 수 있었다

실로 10년 만의 방문이었다.

마음이 내켜 찾아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혼이 됐든 별거가 됐든 부모님께  알리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예전이었다면 연로하신 부모님이 걱정하실 걸 생각해 그냥 조용히 내 선에서 해결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제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오해와 불신만 깊어진다는 사실을.

남편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고 내 뒤에 숨어 죄 없이 순결한 척을 하는 꼴은 막아야겠다 생각했다.


지니가 나를 간병하다 3년 만에 희귀 난치병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부모님은 다시 나를 용서하신 듯했지만 모든 일의 진상을 알고 계신 게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또, 지금 현재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지 못하고 계다.

사실 아픈 것이든, 힘든 것이든 직접 겪고 있지 않는 이상 아무리 설명하고 이야기한들 불행을 겪는 본인 외에는 절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마저 없다면 불행을 지나가며 겪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디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


남편은 교묘하게도 우리가 살던 곳에서 이사를 나올 때 돈이 모자랐던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 없이 죄송하다는 말로만 용서를 구하고 명절이나 생신, 어버이날마다 때에 잊지 않고 친정에 전화를 드렸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내게 더 화가 나신 부모님은 (원래 더 믿고 사랑하는 이에게 화가 많이 나는 법이.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지 간에 말이에요.) 지니가 희귀 난치 병으로 아파지기 전까지 내 연락을 일절 받지 않으셨고 거기에 동조해 오빠와 동생까지 등을 돌리며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명절 때마다 챙겨가며 안부를 묻는 사위와 아프다고 말하며 연락한 번 없는 딸에게 서운함을 묻지 않을 가족이 있을까. 그리고 실제로 그 당시의 난 제대로 연락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난 남편이 뒤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 줄도 모른 체 내게 만 역정을 내시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은 우리 식구뿐 아니라 나의 원가족까지 기만하 내게서 가족을 빼앗아 버렸다.


그때의 내가 신체가 건강하고 정신과 마음에 문제가 없는 상태였더라면 상황이 그 지경까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난 내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는 것은 고사하고 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통제조차 되지 않는 시기였다. 자신의 잘못을 내게 덮어 씌우고 자신은 죄가 없는 척 굴었던 남편이나,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통을 매일 몇 번씩 겪는 나를 모른 척하는 원가족들이나 내겐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모두를 향한 원망과 미움이 짙게 남는 암울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오해를 했던 왜곡을 했던 상관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누구보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가족을  사랑했지만 너무 큰 고통이 지나가면 피붙이라 할지라도 다시 붙을 수 없어진다 한다. 나와 나의 원가족은 그렇게 된 것이다.




친정을 찾아 간 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내가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친정아버지는 속 썩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으시다며 당신 얘기부터 할 테니 넌 그냥 듣기만 하라고 지난 얘기를 시작하셨다. 물론 내 입장이 아닌 철저히 아버지와 가족들의 입장에서 하고 싶었던 말씀들을.

이혼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간 것 자체도 엄청난 부담이었는 데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상태에서 예민해져 있던 내가 아버지 말씀을 듣던 도중에 식탁 의자에서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며 기절을 했다.(지니가 나중에 얘기해 줬어요) 내가 기절하는 모습을 처음 보시고 진심으로 깜짝 놀라신 아버지께서 지니에게 반복해서 같은 말을 물어보셨다고 한다.

지니야. 내가 엄마한테 말하지 말고 듣기만 하라고 해서 기절한 거 아니냐? 어디 다친 건 아니겠지? 119 부르는 게 나을까?

아니에요. 할아버지. 엄마 며칠 힘들어서 그래요. 그리고 금방 깨어날 거예요. 바닥에 떨어질 때 제가 붙잡아서 다친데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깨어났고 푹신한 소파가 있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일련의 소동이 지나간 후에야 우리가 이사 나오던 날부터의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한숨을 쉬시기도 했다가 울분에 차오르시기도 했다가 볼 수도 없이 망가진 내 모습을 보며 비탄에 빠지신 듯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내가 원했던 것도 거기까지였다.

내 편이 있다는 공감과 위로.

나이 50이 넘어 부모님께 이혼을 알리러 가는 자식이 바라는 게 무엇이 있을까. 혹여 있을지 모를 이서방의 자기 합리화에 진실 왜곡당하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얘기의 말미로 갈수록 점점 친정아버지께서 이서방을 대신해 변명을 해주고 계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걱정이 앞서셨겠지. 

아픈 내가 고정적인 수입도 없이 이혼한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걱정되셨겠지. 

시간이 너무 늦어져 미처 못다 한 이야기를 놔둔 채 친정을 나서는 길에 결국 아버진 내 뒤통수에 대고 못을 박으셨다.

그 새끼가 무슨 잘못을 했든 내가 죽기 전까지 이혼은 절대 안 된다.

내가 너무 큰 것을 바라고 친정을 찾았는 가보다.

결국 내가 믿을 곳은 나 하나뿐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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