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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산 것이 정말 바보짓이었을까?

나는 이기적으로 살지 못한다 (2020.08)

by 강나루

내겐 위로는 오빠가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었다.(과거형으로 얘기한 건, 제가 두 번째 희귀 난치질환 판정을 받은 후에 모두 저를 버렸어요)

맏이는 장남이고 아들이라서, 동생은 막내라서 자연스레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부모님이 일부러 차별하신 건 아니었지만, 다자녀 집안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사랑의 크기 차이는 분명히 있었고, 그 속에서 내가 사랑받고 살아남으려면 나만의 방식이 필요했다.


나는 둘째들이 흔히 그러듯 배려하고 양보하고, 인내하고 싹싹한 쪽을 택하며 살았다. 그게 사랑받는 길이라 믿었고, 다 같이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길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부모님도, 형제도, 친척도, 이웃들도 모두 나를 ‘착한 나루’라 불렀다. 나 역시 그렇게 불리고 싶어 했고, 무엇이든 해결해 주는 120 다산콜센터처럼, 어느 번호나 안내하는 114처럼, 무슨 얘기든 들어주는 listener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다.

좋게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한마디로 '감정 쓰레기통'같은 역할이었죠.
이것도 나중에나 돼서야 깨달았지만요.
하지만 사실 별 상관도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제 마음은 진심 이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제 사람들에겐 제가 나눌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걸 나누며 살아갈 생각입니다.
너무 가진 게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내게 병이 생기고 어려움이 닥치기 전까지, 정작 나 자신이 편안한지, 행복한지는 생각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라셨다 했다. 다행히 좋은 머리를 타고 나신 덕에 성공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말씀드리면, 그 시대를 살아내신 분들이 대체로 그러셨듯이 제법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지만, 아버지의 아버지, 곧 저의 할아버지께서(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셔 뵌 적은 없습니다) 노름과 술로 재산을 모두 잃으셨다고 합니다.
생활비를 한 번도 집에 보태신 적이 없어, 할머니께서 온갖 고생을 하시며 세 아들을 키우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촌 누님 댁에서 두 아들의 과외를 맡아 숙식을 해결하셨고, 과외비로는 등록금을 충당하셨습니다. 모자라는 학비는 장학금으로 메우시며 어렵게 대학 과정을 마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당신이 고생하셨던 기억 때문인지 스스로에게는 단 돈 100원조차 함부로 쓰는 것도 아까워하셨다. 운동 후에 음료수 한잔을 마시지 못하고 타는 목과 마른입으로 집으로 돌아오시고, 강아지 눈물을 닦아 줄 때도 화장실 휴지 한 칸을 반쪽으로 잘라 사용하실 만큼 절약하며 사셨다.

하지만 자식인 우리들에겐 무엇하나 소흘함 없이 챙겨 주셨고 무엇보다 결혼할 때 셋 다 돈을 보태 주시어 아버지 근처에(덕분에 강남에서 45년을 살았네요) 살게 해 주셨다.


하지만 세상 모든 돈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평범한 이들에게 불로소득(不勞所得)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모든 일에 관여하기를 원하셨고 그걸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 쪽으론 말이 통하지 않는 분 이셨다. 아버지가 주시는 돈을 마다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아예 없었다.

우선 아버지의 불같은 성미를 피하기 급급했고, 주신 돈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그저 죽을힘을 다해 애썼다.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고생하며 살아오신 아버지에 대한 예의였고 그 돈을 쓰는 것에 대한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입안의 혀처럼 살기로 마음먹었고 또 그렇게 살았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부모님이 원하시는 일은 다른 모든 일에 앞에 두고 생각했다.

싹싹하고 부지런하게 한 발 앞서 생각하며 살았다.

부모뿐 아니라 형제자매에게 모두 그렇게 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했다.

내 주변에 있는 내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당연하게 여긴 건 오히려 가족이었다. 나는 병으로 고통스러워도 가족들에게 힘들다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시간이 흐른 뒤에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때쯤 가볍게 흘려보냈다. 가족이 나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는데 내가 가장 절망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등을 돌린 이들이 가족들이었다. 남편과 오빠, 새언니, 여동생.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일을 겪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는 나보다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며 살아왔다. 오빠처럼 술로 풀지도 않았고, 동생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살지도 않았다. 백 번을 다시 산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게 내 방식이었고, 그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길이었다.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사랑을 나누며 살아온 지금까지의 내가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난 그 믿음 대로 살아갈 생각이다.


사람이 생사를 오가는 큰 어려운 일을 겪거나, 주변이 들썩일 정도의 좋은 일을 겪게 되면 반드시 내 주변 사람들의 됨됨이를 알게 된다. 더불어 나의 됨됨이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생사 고락 간에 옳고 그름의 여부를 따지 않고, 이익의 유무를 떠나 온전히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착하다는 말이 욕으로 들리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차마 견뎌내기 어려운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통증에 매여,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를 위해 귀한 시간을 내주는 나의 사람들을 보며 난 역시 아마도 남은 평생도 여전히 그들을 위해 바보짓을 하며 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착한 바보들을 위하여 파이팅을 외친다.

착하디 착한 그대들이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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