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음식을 만들 수 있다면 1(2020.10)
가을은 꽃게 중에 수게가 제철이다. 수게는 살이 부드럽고 달며 감칠맛이 뛰어나 찜이나 찌개를 해 먹을 때 제 맛이 난다. (11월 중순쯤이 지나면 암꽃게도 수율(水率)이 좋아지긴 하지만 게장을 담가 먹을 것이 아니니 우선 pass! 그리고 일단 가격도 수게가 암게보다 훨씬 쌉니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꽃게 찌개를 사랑한다.
가을에 게 찌개를 끓일 땐 항상 애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고 대파를 듬뿍 사용한다.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의 애호박은 채소 특유의 단맛이 듬뿍 들어 게 찌개를 끓일 때 따로 육수를 내지 않아도 호박의 단맛과 대파의 칼칼한 맛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하고 칼큼한 맛을 낼 수 있다.
게 찌개를 끓일 때는 고추장을 소량만 사용하고 고춧가루와 역시 소량의 된장을 넣어 혹시! (생물이라 절대 비리지 않겠지만!) 혹시, 조금이라도 날 수 있는 비린내를 잡는다.
그리고 첫 간은 조선간장을 조금 사용하고 마지막 간은 꽃소금으로 하여 넉넉하게 국물을 잡고 보글보글 끓여낸다. 찌개를 끓이고 남은 애호박은 (아니면 항상 여분으로 넉넉하게 준비합니다^^) 착착 채를 썰고 여기에 비슷한 양의 양파도 채 썰어 섞고, 부침가루를 묽게 풀어 함께 섞는다. 기름을 넉넉히 두른 프라이팬에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로 얇게 펴 바삭하게 부쳐낸다. 양념장은 호박과 양파의 맛을 크게 죽이지 않도록 양조간장에 식초 조금, 그리고 고춧가루 조금을 뿌려 상에 놓는다.
이 두 가지만 만들어 놓고 김치만 예쁘게 썰어 놓아도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이 근사한 밥상이 완성된다.
우리 집은 계절에 상관없이 닭백숙을 자주 해 먹는다.
중 사이즈의 닭을 크기에 따라 2~3마리 정도 사서 꽁지를 잘라내 버리고 껍질을 모두 벗긴 뒤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낸다. 이때, 소주나 정종을 반 컵정도 함께 넣어 닭 비린내를 날려 버린다.
사실 껍질을 함께 조리해야 훨씬 고소하고 맛있는 백숙이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여자들의 평생의 숙적인 다이어트를 생각해서 내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제 이렇게 데쳐낸 닭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양파 한 덩이와 통마늘 여러 개(15개 정도) 넣고 1시간 정도 뭉근하게 끓인다. (압력솥으로 하시면 훨씬 빨리 조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집은 마늘을 조금 많이 넣는 편이다. 양파는 나중에 건져내 버리면 되고, 마늘은 익으면서 고기 맛과 어우러져 밤 같은 고소한 맛을 낸다. 남은 국물에 죽을 쒀 함께 으깨 먹어도 꿀맛이고, 칼국수를 끓여 고명처럼 얹어 먹어도 역시 끝내준다!
특별한 조리법이 없어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닭백숙은 더운 여름에 지친 기운을 돋워주고 추운 겨울엔 따뜻함을 안겨주어 여러 모로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아 잘 익은 백숙을 건져내 살을 발라서 맛있는 꽃소금과 후추를 섞은 것에 고기를 찍어 먹다 보면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이 아니고 무엇일까!
6년여 전, 두 번째 희귀 난치질환인 CRPS 진단을 받고 나서는 집안일에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하루에도 수차례 불시에 찾아오는 돌발통은 물론, 자율신경실조증으로 인한 기절과 반복되는 두통, 베체트 증상까지 겹치며 나는 어느새 침대 밖을 벗어날 수 없는 중환자가 되어버렸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일과 합병증들이 얽히며 우울증과 해리 장애까지 심해지자, 모든 일은 결국 딸에게 떠맡겨졌다.
아이가 준비가 되었는지 아닌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의사결정은 고사하고 매일 먹던 밥 한 끼마저도 내 손으로 차릴 수 없게 돼버린 나를 보며 남편은 이제 막 성인이 된 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버렸다.
학교를 다니면서 가정의 살림을 살고, 집안일을 하면서 아빠의 회사일을 돕고, 엄마 병원의 보호자 노릇을 하며 간병을 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간 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밥 한번 해본 적 없었던 딸은 아픈 엄마를 위해 이제 만들지 못하는 음식이 없을 정도의 프로 조리사가 됐다.
내가 다시 지니를 위해 맛있는 한 끼의 밥상을 차릴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지난 세월 동안 하지 못했던 맛있는 밥과 반찬들을 다시 만들 수 있는 날이 오기는 올까? 그것들을 만드는 방법을 아직 잊지는 않았을까?
기대하지 말고 살아야 실망도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기대하고 싶다. 그저 내가 만든 소박한 한 끼라도 다시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
To be continued......